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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목사 설교

[박조준목사] 성숙한 그리스도인

사도행전 21:1∼16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잠깐 생각했지만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떠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사도 바울과 에베소의 성도들 사이에는 긴 세월을 같이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깊은 사랑의 유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한데 묶고 떨어지기 어렵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긍휼과 친절과 겸손과 절제, 그리고 인내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사랑에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는 중에 처음으로 상륙한 곳은 그가 탄 배의 짐을 풀기 위해 정박한 두로였습니다. 두로는 세계적인 시장으로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요새 말로 하면 홍콩이나 싱가포르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국제적인 시장 도시인 두로를 세계 선교의 전략 기지로 중요하게 생각했었습니다. 두로에서 유능한 제자들이 양성될 수만 있다면 세계 선교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어려움에만 사로잡혀서 그것들이 전반적인 상황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두로에서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 일할 역군들을 키워낼 계획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일들을 심중에 두고 그에 따라서 전도 사명을 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대할 때 그리스도의 제자로 대접하고 그들의 영적인 삶과 전도 사업을 도와주었습니다. 제자들의 교리에 대한 지식을 뒷받침해 주고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데 있어서 그들을 단련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접하고 그들의 개인적인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온종일을 소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영적인 훈련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자기의 일을 잘 감당하고 가정 생활을 원만하게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다음 목적지는 가이사랴였습니다. 여기에는 누가, 빌립, 그리고 빌립의 네 딸, 예언자인 아가보, 그리고 바울 사도가 같이 가기로 되었습니다. 얼마나 멋진 전도단입니까!

누가로 말하면 훌륭한 의사요, 신약성경의 누가복음과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빌립 집사는 2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으로 택함을 받은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네 딸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를 받아서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더 설명할 여지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신약성경 중의 대부분을 쓴 위대한 신학자이며 능력 있는 전도자, 유명한 교회의 창설자요, 목회자였습니다. 그리고 아가보는 예루살렘교회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쓰임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로 전도단이 구성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기대할 만했습니다. 이 전도단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바울의 말이 참됨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4∼7절에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이 전도단은 각기 다른 은사를 받았고 하나님께로부터 다른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덜 중요한 사람이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에 비교하면서 ‘나도 저 사람과 같았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일 뿐더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생각은 유혹입니다. 이런 유혹을 물리쳐야만 합니다. 전지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주님은 그가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를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지으셨고 하나님의 목적에 맞도록 우리를 그 자리에 배치해 놓으셨습니다.

가령 빌립은 이 전도단원 중에서 가장 열심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가 계속 힘있게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모습이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게 했겠습니까?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를 택했는데, 나머지 집사님들(스데반은 순교한 후)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들이 다 훌륭하게 생을 마쳤기를 바랄 뿐입니다.

 

가이사랴에서 아가보가 바울에게 한 말은 매우 의미 있는 말입니다. 그의 말을 통해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무엇을 위함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이 처하게 될 위험을 미리 경고하신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주님께서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해를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6)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그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11절을 보세요.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했습니다. 이때 바울 사도의 각오에 가득찬 대답이 뭐였어요?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 21:13). 바울은 그 앞에 어떤 난관이 있어도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나중에 바울이 전도하기 위해 다시 그들에게 왔을 때 가장 놀란 사람들은 가이사랴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그렇게 간절히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 만류를 듣지 아니하고 나서자 본문 21장 14절에 보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 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고 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비록 권면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고 마음이 아팠지만 그들은 이 일에 있어서 주님을 믿었고 주님께 문제를 맡겼습니다.

 

여느 때처럼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면서 스무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행 21:15∼17)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손이란 사람은 아주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표준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기도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9∼10) 했습니다.

 

첫째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모든 결정을 내릴 때 다른 사람의 인도에 의존하지 아니합니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단계에 이르도록 우리는 도와 주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무슨 일에서든지 자기 스스로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합니다. 성숙하게 되면 스스로 분별력과 주체성과 건전한 판단을 가지고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둘째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집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깊은 지식을 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서 실패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이 배웁니다. 인격인 하나님을 교제를 통하여 알게 됩니다.

 

셋째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권능 안에서 강건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신령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필수적인 조건이 강건한 심령입니다. 약한 심령은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약한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물론 우리는 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함에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세요. 우리가 강건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힘이지 우리의 힘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자랑하지 아니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좋은 경험과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 범사에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빌립보서 1장 9∼1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표적을 말씀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지식과 영적 통찰력에 기초를 둔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에게도 넘치는 능력으로, 사랑으로 주는 것이 성숙의 표적입니다.

예수의 장성하신 분량에 이르기까지 장성하라고 하신 말씀도 그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과 자격이 있어서 받았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실상 주님의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원수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의 사랑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은 성숙하신 인격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먼저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할 줄 아는 데까지 자라는 성숙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주님의 교회가 하는 일, 또 해야 할 일들은 다 좋은 사업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무엇이 급선무인가 하는 것을 바로 찾아서, 다시 말해 어떻게 지극히 선한 것을 구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어린애들은 무엇이든지 눈 앞에 있는 일부터 먼저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애들은 질서 있게 계획에 따라 일을 해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이 되면 우선 순위를 정할 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생활을 통하여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선택을 하며 삽니다. 학생이 학교를 갈 때 무슨 옷을 입을 것인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방과 후에는 친구들과 같이 탁구를 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일 있을 시험 준비를 할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을 하는데 무슨 과(科)를 선택하여 전공을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스스로 택해야 합니다. 공부는 잘 해도 지혜가 없는 학생은 그저 소위 일류 학교의 인기 있는 학과를 택합니다. 얼마 전 어떤 책을 보니까 일류 대학교의 인기 있는 학과에서 공부하는 학생에게 공부하는 것에 대한 만족도를 물었더니 75퍼센트의 학생이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에 만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자기 스스로 택하는 것입니다.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맡으면 발전도 없으려니와 그 방면에서 대성하기가 어렵고 또 만족도 없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본인들의 의사는 거의 무시하고 부모님들 사이의 합의를 따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이라는 절차를 밟아 가정을 이루어 그런 대로 잘 살아 갔습니다. 내용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이혼하는 경우도 별로 없이 가정을 꾸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본인 위주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기들끼리 좋으면 같은 직장에서 만나서 좋아졌든, 한 반에서 같이 숙제하다가 정이 들었든, 가정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다 가까워졌든, 친구의 소개로 만나서 몇 번 데이트하다가 마음이 맞았든, 버스 안에서 발을 밟아 미안하다는 말을 하다가 그만 시선이 부딪혀 불이 번쩍 나서 다시 만나게 되고 그러다 좋아졌든, 경우와 동기는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결정은 본인들이 대개 하고 부모님에겐 동의를 얻는 정도입니다.

 

저는 이런 현대식이 더 좋고 저런 구식이 나쁘다거나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가 좋아져서 어떤 동기에서든 결혼까지 했으면 책임을 지고 잘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좋아한다고 그럴 때는 언제였는데 이제는 싫어져서 못 살겠다고 합니다. 

옛날처럼 결혼하는 것이 반강제였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택은 자기가 했으면 책임도 자기가 져야 성숙한 사람입니다. 선택은 자기가 하고 책임을 지지 못하는 것은 아직 미숙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결행하고 책임지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성숙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넷째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 것은 그 표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이 모든 면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과거의 낡은 본성은 사라지고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새로운 영적인 성품이 성숙해지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려고 하면 과거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때에 가졌던 생활 습관, 죄악된 쾌락, 책이나 잡지, 그밖의 세상적이고 육신의 정욕적인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교제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 연구, 그리고 봉사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벧후 1:5∼9).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속성들이 나타나고 우리의 삶 안에서 성장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의 열매를 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스스로를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져 보십시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얼마나 성장했으며 성숙한 자리에 이르렀는가? 나의 삶에 무슨 열매를 맺는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날로 성장해 가고 있는가?’

 

사람이란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어서 그 약점을 미리 알고 그 방면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기관지가 약한 사람, 소화 기관이 약한 사람, 간장이 약한 사람, 그밖에도 사람에 따라서 약한 부분들이 있는데 그 부분을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품 가운데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히 정욕에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에, 혹은 물질에 약합니다. 그 약한 부분을 미리 잘 알아서 조심하지 아니하면 그 곳으로 시험이 들어옵니다.

 

무엇이 나손이란 사람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바울과 베드로가 말한 것이 그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바울과 그의 제자들은 형제들을 찾았습니다. 본문 17∼19절에 보니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보고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것이 아니고, 그의 사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들에 대한 이야기로 풍성했습니다. 이것은 표현상의 문제나 겸양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기쁨 가운데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자랑만 하는 사람들과는 너무 대조가 됩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을 이루시게 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아니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즐겁고도 생산적으로 변모될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보고를 들은 후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한 가지 문제를 말하고 가능한 해결책을 제안했습니다. 유대인이 이미 할례를 받고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그것을 당연한 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으로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할례 받을 필요 없이 예수 믿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하니, 여기에 이견이 생겨서 문제가 되니 다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사업이 화평과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그 해결책에 동의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영혼이 결속되고 화평스러운 유대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도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화평과 단결을 유지하는 지도자의 책임 가운데는 많은 노력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같은 단체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마귀의 공격 방법입니다. 만일 마귀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게 했다면 그것은 일단 성공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마귀가 기쁘게 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화평을 위하여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끝으로 본문 마지막 부분에 보면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성전을 더럽힌 사람”이라는 고소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는 바울을 공격하고 죽도록 때렸습니다. 군대의 천부장의 만류가 없었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처럼 사경에 이르러 있으면서도 사도 바울은 자기의 죽음까지도 복음 전파와 하나님을 증거하는 기회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을 존귀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대로 살았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정신이 있다면 이 땅의 복음화가 얼마나 빨리 이루어질까요.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