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1~20
오늘 읽은 말씀 중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라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셨으니 그는 곧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믿음을 세워야 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로 돌이켰을 때 그들은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며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대로 거듭남의 표적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어떻게 사도 바울이 이 사람들이 아직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참된 제자들이 아니었음을 분별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기자인 누가는 기록하지 아니하였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믿는 사람 사이에 서로 교제하다보면 이와 같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도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교회의 직분을 맡았다고 하기는 하는데 만나고 같이 지내는 동안에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느낌을 가지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일찍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무가 어떻게 생겼느냐? 잎이 얼마나 무성하냐? 가지가 얼마나 퍼졌느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열매를 맺었느냐?”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느냐? 몇 대째 신앙생활을 하느냐? 교회에서 무슨 봉사를 하느냐? 무슨 직분을 맡았느냐?”하는 것 이전에 “그의 인격에서 무슨 열매가 맺었느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끔 교회의 중책을 맡은 분들 가운데서도 ‘저 분이 과연 거듭난 체험을 했을까?’하고 의심스러워 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기초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우리가 거듭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하십니까? 사도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씨는 말씀을 의미하는데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때에 예루살렘에 계셨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그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장 24~25절에 보니 예수님이 인간에 대한 태도에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니라” 했습니다.
이 사람은 믿는 자들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바로 전 절인 23절에 보니 “많은 사람이… 그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부족한 것을, 그들이 아직도 거듭난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음을 아셨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요한복음 3장에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당시의 유명한 유대의 공회원 중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비록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심령 깊은 곳에서는 무엇을 갈급하여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선언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솔직히 말하면 니고데모의 믿음은 그 당시 유월절에 모였던 다른 모든 사람들의 믿음과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생명이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믿는다고는 했지만 거듭나는 삶의 체험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참 생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르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거듭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납니까? 요한복음 1장 12~13절을 보세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를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세우고, 나의 삶의 중심에 그를 모실 때 나의 심령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을 때 거듭나 새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심령이 거듭나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우리의 심령이 주 안에서 새로워질 때 소망이 달라지고,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삶의 의미가 달라지고, 보람이 달라지고, 인생관과 세계관, 우주관이 달라집니다. 옛날의 습관이 시들해지고 옛날의 소망은 간 데 없고 옛날의 쾌락은 보잘것없어집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둘째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실상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살아 있었다면 그것은 죄 속에서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불의의 종노릇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에 있는 물을 쏟아 버리면 그 병 안이 공기로 가득 차는 것처럼 우리가 죄의 종에서 벗어나면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4~5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그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셋째로, 능력의 새 원천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된 우리, 다시 말해서 거듭난 새 사람이 된 내 안에 성령을 통해서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새롭게 되었다고 하지만 마귀는 기회 있는 대로 자기의 세력 밑에 넣으려고 마치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닙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옛 습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 아래서 새로운 삶의 길을 갈 수 있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거듭났다는 말은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더 이상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 고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넷째로, 완전한 자리로 나아갑니다.
주님을 떠나서 세상에 속해 사는 사람은 그 삶에서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돈도, 명예도, 지식도, 권세도, 쾌락도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을 얻으면 공허감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쾌락과 물질과 명예와 권세를 추구해 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미칠 지경이 되어 술과 마약에 매달려 보지만 여전히 허탈만 더 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좌절되어서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세상의 것은 얻으면 얻을수록 더 얻고 싶고, 누리면 누릴수록 더 누리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목이 말라서 그럽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공허한 우리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실 때 만족과 완전으로 그 공허를 메워 주십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대낮에 물을 길러 나왔던 여인에게 주신 말씀은 너무 유명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수 샘은 우리 안에 고여 있는 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선한 샘물처럼 우리 심령 안에서 끝없이 솟아납니다. 우리가 생명의 물을 나눠 마시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을 때 우리 심령의 갈증은 멈춰지고 배고픔이 충족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육신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완전해 질 수도 없고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다윗의 간증은 너무 의미 깊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러분 모두가 다윗이 받은 축복을 다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다섯째로,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은 앞으로 얻게 될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소유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5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불안이 해소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여기의 시제는 과거형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며 우리의 심령이 거듭날 때 이미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까?
여섯째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됩니다.
어두움의 권세의 억압에서 풀려 나와서 하나님 나라의 광명으로 들어왔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 심령이 거듭나기 전에는 어두움의 세계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초조해 하며 두려워하며 잘못된 길에서 기진하고 좌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거듭나 새 사람이 되면 언제나 빛 가운데서 인생길을 강하고 담대하게 걸어갑니다. 확신을 가지고 주저함이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며 감사와 기쁨과 행복이 넘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그뿐입니까? 우리가 거듭나면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권세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기워질 때 우리의 이름은 천국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까?
사람에게 분명한 것이 많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너무 분명한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이요, 그 다음 하나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순서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코에 있는데 사실 수에 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 죽는다는 것을 꼭 기억하면서 살아야 어리석게 살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심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검찰이 있고 재판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이 세상의 재판은 공정한 재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상적인 재판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여기에는 속임수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억울한 일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보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 생각한 것, 말한 것, 행한 것 모두를 책으로 기록했는데 각자가 다 있으니까 “책들,” 복수형입니다.
이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면 우리 가운데 구원받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요? “세상에 의인이 없나니 곧 하나도 없다”고 일찍이 사도 바울이 선언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게 되면 사망과 음부인 불 못에 던지움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성경에 보니,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으니 곧 생명책이라” 했습니다. 이 책은 복수가 아니고 단수입니다. 책 이름은 생명책입니다. 누가 이 생명책에 기록됩니까?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이 말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단지 지은 죄를 주님께 고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했습니다. 우리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니 우리가 범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구원받은 14만 4천을 말하면서 14절에 보면,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죄로 더럽혀 진 옷을 예수의 피로 깨끗케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죄 씻음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서가 아닙니다.
평생에 행한 일 돌아보니 못 다한 일 많아 부끄럽네
아버지 사랑이 날 용납하시고 생명의 면류관 주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험한 세상 걸어가는 동안 주 안에서 거듭나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으면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고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생각만 해도 감격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의 이름 하나 하나가 생명책에 기록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사람들이 묻는 질문에 성경적인 해답을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혹 성경에 대한 질문을 받고 대답하지 못한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연구하세요. 성경에 해답이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의 목사에게 묻고 도움을 청하세요. 우리는 해답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청중들에게 진리를 권했습니다. 우리의 책임도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미루지 말고 거부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잠언 27장 1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하였습니다.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있을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 중 수천명이 내일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오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외칠 때 성령은 필요한 사람에게 확신을 주시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끝으로, 9~10절의 말씀은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여기서 기독교를 “도”(道)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하늘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이었을 때 우리는 기독교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시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십니다. 죄에 대한 심판도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고의 방식이며, 생활의 방식이고,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생각과 삶과 구원의 길에 대해 유대인들에게 석 달 동안이나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제시한 모든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비극입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을 모르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을 때 주님을 영접하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구원의 대로가 여러분에게 이르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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