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8:1~17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행한 일을 보게 됩니다. 고린도는 아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리적 위치를 말하면 에게해와 아드리아해 사이를 연결짓는 그 당시의 무역항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라 사람, 로마 사람 그리고 중동 지역에서 무역을 하는 사람들이 고린도에서 만나곤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항구 도시는 돈이 많이 유통이 되고 외국 사람들의 출입이 잦으니까 여러 가지 타락한 기풍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처럼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면 자연히 복음이 사방에 널리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고린도에 도착하자마자 복음 전파의 전략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본문 1~3절을 보세요.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인도로 신실한 부부를 만나 그들과 함께 주의 사업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배웠고 교훈들을 그들에게 힘써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동역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 방법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처럼 제자 훈련에 힘을 쓴 사람입니다.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복음의 비밀을 가진 그는 자기 혼자만 이 비밀을 간수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많은 사람에게 전해야 하므로 그 방법으로 제자 훈련에 주력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한 것은 오늘 우리가 사도 바울이 어떻게 제자 훈련을 시켰는가 그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바울이 제자 훈련에 사용한 내용의 요약입니다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0~11절입니다. 같이 찾아서 읽었으면 합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이 제자를 훈련시킨 내용에서 특별히 강조한 점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첫째는 교훈입니다.
제자들은 사도 바울의 교훈을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읽어 보아도 그가 여러 가지 주제들에 관해서 어떻게 마음에 두고 생각했으며 해결했나를 살펴 볼 수가 있습니다.
그가 늘 생각하고 탐구했던 주제들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경건한 소망과 사랑, 그리고 복음과 구원, 그 밖의 여러 가지 문제였는데 그것들을 가지고 제자들을 교훈하였습니다. 교훈을 받지 않은 제자는 사실 엄격한 의미에서 제자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는 행실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의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가장 잘 알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분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일하는지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몇 달 입원해 있는 동안 발견한 것은 의사를 훈련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나 의과 대학은 비교적 두뇌가 우수한 학생들이 지원해서 굉장한 경쟁률을 뚫고 입학해서 6년 동안 열심히 학문을 배웁니다. 그리고 인턴으로 1년, 레지던트로 3년 혹은 4년의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머물러 있으면서 지도 교수의 명령에 아무 이의 없이 따라서 교수님이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처리하시나 하는 것을 실제 몸으로 배웁니다. 그리고 나서야 전문의 시험을 볼 자격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제자 훈련의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지내며 함께 여행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어려움을 나누며 전도하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여름이면 젊은이들이 지방에 봉사하러 나가는데 교육과 훈련 면에서 굉장히 효과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의향입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세계를 복음화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을 다하여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다른 데 보면 이 사명,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회당에서도 전도했습니다. 시장에서도 증거했습니다. 감옥에 수감되면 간수에게 전도했습니다. 배를 타면 같은 배 안에 있는 사람에게 전도했습니다. 왕에게도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0~11절에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다메섹 도상에서 멈추게 하셨던 지존하신 주님의 그 깊은 뜻을 다 측량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늘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 대하여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알고 싶은 것이 더 많아졌습니다. 바울의 두 가지 목적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넷째는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설명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감옥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가지고 믿음을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 폭풍이 몰아쳐서 살 소망이 없어진 때에도 배의 갑판 위에서 백부장, 선장, 모든 선원, 그리고 죄수들을 위로하며 믿음을 통해 힘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는 말과 행동으로 믿음을 가르쳤습니다.
믿음의 두 가지 큰 적은 두려움과 의심입니다. 우리의 생활 주변에 두려워하며 의심하는 분이 계시면 여러분이 담대한 믿음으로 그들을 격려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실라가 매 맞고 갇혔을 때 그들이 불평했습니까? 저항하는 노래를 불렀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속이 답답하고 안타까와 안절부절 못하면서 철창을 흔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곧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들이 찬송할 때 다른 죄수들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시험이나 시련을 당할 때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남겨 줍니까?
다섯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이란 어떤 부당한 대접을 받을지라도 냉정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여섯째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분별할 수 있는 표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구별할 수 있는 표적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사랑의 표적을 달고 다녔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그의 사랑은 뚜렷했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주는 것이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아낌 없이 주었습니다. 그는 에베소교회에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 이것이 사랑입니다.
일곱째는 인내입니다.
얼른 생각하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오래 참음과 같은 내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뜻이 다릅니다. 인내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으며 물러서지 않고 싸워 나가는 자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입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인내에 대하여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0~11). 바로 이 꾸준한 인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완전하게 됩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을 읽어보세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하였습니다.
여덟째는 핍박입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을 보면 적들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복음 전파 사업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마지막 요소는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군대는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전진을 계속하도록 부름을 받은 군대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얼마나 고난을 받았는지 그 자신이 겪었던 괴로웠던 경험을 고린도후서 11장 24~28절에 기록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의 고난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그 몸에 가시”가 무엇이었는지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하나 그것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던 것만도 사실이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가시를 제거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하므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개인적으로 당하는 가장 어려운 상황들을 극복해 낼 수 있는 힘을 어떠한 방법으로 주셨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사도 바울이 제자들을 훈련시킨 것은 말로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가르쳤습니다. 이와 같은 원리로 디모데를 훈련시켰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훈련시켰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훈련시켰던 안디옥은 아주 적절한 훈련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시작하면서 고린도의 형편을 잠깐 생각하고 지나쳤습니다만, 고린도는 그 당시 온갖 형태의 죄악이 범람하였던 대표적인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의 일부를 보아도 대개 짐작이 갈 정도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1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여기 죄악의 항목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상기시킴으로써 사도 바울은 또한 전도의 전략상 요지인 항구 도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명백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현상은 옛날 고린도 도시만 그랬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은 어떻습니까? 그러면 이와 같은 곳에는 희망이 없습니까? 이러다가 아주 망해 버리고 말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를 버리지 않으시고 니느웨를 버리지 않으셨던 것처럼, 이 서울도 회개하기만 하면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그처럼 희망이 없어 보이던 고린도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 사도 바울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종교적인 유대인이었습니까? 아니면, 죄와 부패 속에서 살던 이방인이었습니까? 사도행전 기자인 누가는 고린도에서의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업의 문제점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그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행 18:4~6) 했습니다.
보세요.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을 괴롭힌 사람들이 이방인들입니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도 예수님을 핍박하고 비난하고 전도를 방해한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그 당시 종교인으로 자처하는 바리새파 사람들, 사두개파 사람들, 장로들이었습니다.
오늘은 어떻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도 사업을 방해하는 사람은 처음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랫동안 믿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마세요. 그러면 오래 믿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방해가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거듭나지 못하고 새 사람 되지 못하고 신령한 체험을 하지 못하고, 성령이 충만하지 못한 사람은 오래 다녔으면 다녔을수록 교회의 형식과 의식, 조직과 법만 알았지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굽니까?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려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라면서 여름철에는 간식으로 감자를 삶아서 깨소금을 찍어 오이 냉국을 먹곤 했습니다. 어떤 때는 할머니가 일손이 바빠서 감자를 삶지 못하면 제가 해 본다고 솥에다 감자를 씻어 놓고 물을 적당히 넣고 불을 땝니다. 마음이 급해서 5분쯤 후에 숟가락 꼭지로 감자를 찍어 봅니다. 10분쯤 있다가 또 솥뚜껑을 열고 감자를 찍어 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감자가 푹 삶아질 때까지 약 30분 정도 밑에서는 불을 계속 때고 솥 안에서는 뜨거운 수증기로 감자를 삶는데 자주 솥뚜껑을 열면 증기가 빠져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익지도 않고 설지도 않아 못 먹게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교회라는 솥 안에서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통해 돌같이 굳었던 심령이 완전히 녹아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하고 교회당 문만 드나들게 되면, 사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는 큰 문젯거리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면 직분도 맡습니다. 직분 맡기 전보다 맡은 후에 열심이 식어지기 쉽습니다. 처음 믿을 때는 순진하기라도 했는데 교회에 오래 다니며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밴들밴들 닳고 닳아서 말썽꾸러기 노릇만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 충만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종들을 돕고 하늘 나라 건설을 위해서 크게 일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 세계로 돌아섰을 때 그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스스로에게 초래한 패망에 대해 자기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알렸습니다. 바울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일들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상징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이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결정과 그 결정이 낳은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6절). 사도 바울이 오죽하면 이런 말을 했을까요? 그때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반대에 부딪혔을 때, 그는 주님께로부터 위로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본문 18장 9~10절입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니라.”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첫째로,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반대입니다. 예수님도 풍랑으로 인해 두려워 떨며 살려 달라고 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적은 자여 왜 두려워하느냐?”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주위 환경이 아무리 어둡고 어렵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도 바울로서는 이대로 행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조차도 담대한 증거를 계속하기 위해 위로의 말을 필요로 했음을 가리킵니다. 복음을 계속 전할 수 있도록 격려가 필요할 때 우리에게는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분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우리 쪽이 문제입니다. 평안하고 형통할 때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에 담대하게 살아가지만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면 주님이 나를 떠나신 것으로 생각되어 염려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약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둡고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아무도 너를 해롭게 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에서 바울에게 목적을 두셨고 그 목적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시켰습니다. 싸움에서 일시적인 후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싸움을 승리로 이끄시는 것을 알 때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다섯째로,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문법적으로 현재 시점입니다. 주님께서는 고린도에서 많은 사람을 얻으실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이미 백성들을 얻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그 백성을 보지 못했었지만 제자들은 그 성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고독을 느끼고 절망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 우리는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위로를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고린도보다 더 험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사도 바울에게 주신 말씀이 언제나 들려져서 힘이 되시고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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