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7~35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 내려가면서 사도 바울의 경우 전도 여행을 혼자 하지 아니하고 동행자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아도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했습니다.
왜 바울이 이 사람들과 함께 다녔을까요? 바울은 세계 복음화의 목적을 이룩하는 데 자기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해외 전도를 할 만한 사람들을 오랫동안 훈련시켰습니다. 이것은 매우 요긴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자라게 하고,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효과적인 일꾼이 되기 위해서 어떤 단계가 필요합니까?
우선 자신이 온전히 거듭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거듭난 체험이 없을 때 다른 사람의 심령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전도에 대한 열의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꾼이 되려면 성장해야 합니다.
자신이 성장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성장하는 것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2~15)고 말씀했습니다. 지도자가 성장해야 교인들도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일꾼이 되려면 성숙해야 합니다.
새 생명이 귀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필수 조건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심령이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 참된 헌신을 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나무가 자라나서 성숙해지면 자연히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의 심령도 성숙해지면 믿음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나 분명하게 그리스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경을 외워야 합니다.
말씀을 꾸준히 받아들임으로 기쁨을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하며 깊이 있고 폭 넓은 기도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의 깊이가 얼마나 되며 그 넓이가 얼마나 됩니까? 아직 어린아이의 기도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맴도는 분은 안 계십니까? 기도 생활도 성숙해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만을 위해 살며 하나님 나라의 사업에서 쓸모 있는 정결한 삶을 영위하는 신앙인으로 성숙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어디까지나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일꾼은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려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추수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동참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오도록 돕는 방법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 성장하는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전념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야 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성장을 위해 힘쓰고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에서 그들이 발전하도록 도울 때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룹으로 공부시키고 훈련시키지만 뛰어난 헌신적인 일꾼은 개별적으로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지만 특별히 열두 사람을 택해서 훈련시키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와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훈련을 집중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전도 여행을 계속하면서 바울의 심중을 어렴풋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 사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하는 중에 밀레도에 도착하자 성전에 장로들을 불러 모아 만나기를 청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0장 18절 이하의 말씀은 감격적인 말씀입니다.
“장로들이 오매 바울이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이처럼 그 당시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제까지 자기가 그들 가운데서 행한 일을 요약해서 말했습니다.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지도자, 사명따라 사는 사람, 바울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지도자 선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6절에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했습니다.
지도자는 늘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며,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재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고도 자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저는 가끔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어린 나귀를 상상해 보곤 합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서니 수많은 사람들이 옷을 벗어서 길에 펴며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하며 대환영을 합니다. 나귀는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이처럼 자기를 좋아하고 위해 주고 환영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것은 나귀의 착각입니다.
오늘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이와 비슷한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이 적지 아니합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사랑을 받고 환영을 받는가 하는 것을 알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의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어느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이 있다고 교만하고, 돈이 좀 있다고 교만하고, 권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교만하고, 재간이 있다고 교만하고, 얼굴 예쁘게 생겼다고 교만하고… 정말 생각하면 무서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6~7)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서도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을 자랑하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친절한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도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곳을 떠나게 되자 아주 감동적인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0장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에베소 사람들이 바울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했으면 이렇게 하였겠습니까?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바울이 그들을 뜨겁게 사랑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그처럼 기뻐하고, 대견스럽게 여기고, 그들을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아니 할 정도였었습니다. 주님의 교회에 이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다정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저로 하여금 제게 맡겨진 이 귀한 양 무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우리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힘쓰십시다.
셋째로, 바울은 강한 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사도 바울에 대한 기록을 읽은 것을 기억하면, 그는 생명을 위협하는 말할 수 없는 시련을 겪었으며 여러 가지 형태의 반대와 어려움에 직면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거나 주저하거나 후회하지 아니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 머리를 들었습니다. 그를 저지하려는 숱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아니했으며 강한 마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2~24절).
사람이 자기의 생명을 내놓고 나서게 되면 이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초인간이 됩니다. 강한 의지를 가지게 됩니다. 어떤 일에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강한 의지가 있으면서도 사랑과 겸손이 조화를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강한 의지만 가지다 보면 사랑과 긍휼이 전혀 없는 냉랭한 사람으로 변모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랑과 겸손, 그리고 강한 의지의 균형을 잘 이루어서 지도자로서의 훌륭한 인격을 소유할 수가 있었습니다.
강한 의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속성입니다. 지도자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길을 인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향해서도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거듭거듭 하였습니다.
넷째로, 바울은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0~21절의 말씀을 보세요.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말해야만 할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누구의 눈치가 무서워서 할 말을 하지 못한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말해야 할 것은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때때로 지도자는 오해를 받고 감정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지도자가 감수해야 할 모험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엉뚱한 때에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도 그 동안 20여 년 동안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별별 이야기를 다 들어 왔고, 오해를 받아 왔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변명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일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연한 기회에 먼지 하나 남기지 아니하고 다 털어 주셔서 신문에까지 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속이 시원합니다. 그 동안의 오해도 웬만큼 풀렸을 것입니다.
저는 시편 141편 3절을 사랑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우리는 가급적 자기 변명을 위한 말은 안 하는 것이 좋으나 말해야 할 것은 말해야만 하는 때가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가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비유했는지 아세요? 이사야 56장 10절 이하에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하였습니다. 짖어야 할 때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를 어디에 써먹을 수 있습니까? 말해야 할 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섯째로, 바울은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24절)이 그의 분명한 목적이었습니다. 평생을 살면서도 목적없이 그럭저럭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분명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 복음 전파하는 것을 마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주시며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주십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하라 하신 사명을 완수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에서도 뚜렷이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복음 전파 사업의 마지막 무렵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란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의 삶을 통해 그를 뒤따르게 하며, 그들을 일꾼으로 파견하며, 또 열두 사도를 훈련시키는 일을 가리킨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의 사명이었던 구속 사업을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가 마지막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요 19:30)였습니다. 그는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의 목적을 이루었고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이보다 복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 얼마를 살든지 이 세상을 살다가는 한 번 가게 되는 것이 정한 이치인데, 그 사람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내가 할 일을 다 하고 간다”고 말하고 눈을 감을 수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따라서, 그의 목표를 위해서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는 그와 꼭 같은 기쁨에 넘치는 간증을 하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이처럼 바울과 같은 말을 남기고 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어떻게 그가 승리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까?
그에게는 목표가 분명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삶의 목표를 세우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한다”(고전 9:24~26)고 했습니다. 그는 방향을 알고 달음질했습니다. 그러므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명확히 알았습니다.
여섯째로, 바울은 거리낌이 없이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0장 26~27절에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벼운 마음으로 에베소 장로들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처럼, 그도 그가 좀더 잘 할 수 있었던 일들과 미완성인 채로 있는 일들에 대해서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음을 알고 있었고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 앞에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이 범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편지를 보세요.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딤후 4:6).
저는 이 대목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제단에 붓는 기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의 평생 주님을 위하여 그에게 들어 있는 기름을 부었습니다. 정성을 부었습니다. 시간을 부었습니다. 재간을 부었습니다. 지식을 부었습니다. 건강을 부었습니다. 명예도 부었습니다. 다 붓다보니 이제는 더 부을 것이 없이 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보니 이제 세상을 떠날 기약이 가까워 온 것을 육감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제단 앞에 한 방울의 기름도 남기지 아니하고 몽땅 부었습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이 말은 그가 한 일은 모두 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잘못도 있었습니다. 실수도 있었습니다. 실패도 하였습니다. 인간적인 것이 드러날 때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행하심과 존재에 있어서 완전하십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잘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회고한 후에 사도 바울은 지도자들에게 마지막 교훈을 하였습니다. 너무 의미심장한 말씀들입니다. 우리에게도 필요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여러분, 사도 바울이 지도자들에게 양떼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을 기억하세요. 양무리는 ‘아무개의 양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양무리’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도자들에게 목자처럼 양떼를 먹이고 보살피고 인도하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깨어 있어서 양떼를 지키며, 해를 주는 일을 방지하며, 위험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들 자신의 삶에도 꼭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목자가 위험을 만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양떼를 삼키며 흩어 버리려는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깨어 기도하며, 자신을 지키며 맡겨진 양 무리를 악한 짐승의 공격에서 지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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