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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육소식

[박조준목사] 하나님의 복음

사도행전 17:1~15

오늘 본문 사도행전 17장 1절을 읽어보십시다.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여기서 우리가 우선 생각되는 일은 “왜 바울의 전도팀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그냥 지나쳐 갔을까?”하는 문제입니다. 그곳에도 잘은 모르지만 복음을 듣기 원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본문은 그 곳의 필요가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얼른 알아듣기 어려운 말입니다. 필요한 부르심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령 필요는 여러 곳에 있습니다. 만일에 내가 내 눈에 보이는 필요에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면 나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제한된 힘으로는 그 모든 필요를 채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부르신 일을 행해야 하며 다른 필요들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충족되리라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생활 주변에 필요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다 해 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에 두신 목적이 무엇인가 분별하여 그것을 전심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모두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평생 동안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을 때 행한 일을 보세요. 본문 2~3절에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여기 보니 사도 바울이 두 가지 일을 행했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펴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사도 바울이 가르친 모든 것의 근원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사도 바울의 설교에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부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설교를 질서 있게,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전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할 때 반드시 성경에 근거해서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을 알기 쉽게 분명하게 알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복음을 설명할 때 너무 힘든 낱말을 많이 쓰고 문장이 길어서 얼른 납득이 되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한 시간 내내 듣기는 들었는데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에 남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 철학적인 용어나 신학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것은 복음을 전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과거 우리 사회가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때는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해야 되고 알아볼 수 없는 힘든 글자를 사용하여 편지를 써야만 유식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거기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의 복음은 알아듣기 힘든 말의 나열이 아닙니다. 무식한 사람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것을 보세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아주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셨고 설명이 필요할 때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증거할 때 듣는 사람이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게 하나님에게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저는 단에 서서 말씀을 전하기 전에 설교 노트에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다 씁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이 듣는 이에게 잘 이해될 수 있도록 하여주기를 기도하면서 준비합니다. 이 단에 서기 전까지도 저는 이제 말씀을 전할 때 모두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이해 못할 말은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나섭니다.

여러분이 가정 주부이십니까? 오늘 가정 주부의 주요한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걱정거리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고통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실제로 복음이 그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해답을 주는가 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대학 교수입니까? 동료 교수님들과의 문제, 오늘의 대학의 문제가 무엇이며 학생들의 요구가 무엇입니까? 복음이 이 문제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를 찾아보십시오.

여러분이 회사의 직원입니까? 상사와의 문제가 무엇이며 동료 직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직장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복음은 어떤 해답을 주고 있는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복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 그 사람이 어떤 위치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거기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가장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해답을 주며 지혜와 용기, 그리고 인내심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 중에 주님께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습니다. 역사 이래로 문제를 안고 예수님께로 왔다가 해결받지 못하고 절망 중에 돌아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그러므로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주변에 스스로 해결 못한 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있는 분에게 바로 복음을 소개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지적인 끈으로 엮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참된 복음은 회개, 믿음,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부활입니다. 이것을 전하면 됩니다.

복음을 명확하게 전하시고 실제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제시하세요.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그가 체험하고 있는 사실을 간증한 것을 기억하세요. 그의 간증은 그의 메시지를 생생하게 전달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메시지에 권능과 생명력을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바라보는, 공중의 구름처럼 떠돌아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나의 실제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였으며 지금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체험한 대로 간증하며, 이처럼 살면 당신에게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삶의 의미를 갖게 되고, 하루 하루 삶의 보람을 찾게 되리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 바로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될 때 사람의 마음에서 역사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해서 세상에서 계속 역사하기 위해서 택하신 통로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것만 없으면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서 계속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 18절에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정말로 아름다운 모범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복음의 통로입니다. 통로 구실만 바로 하면 됩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곳에서 복음의 통로 노릇을 바로 감당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오늘도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의 통로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늘 마음속에 간직할 때 우리 마음속에는 평화가 깃들 것이며 기쁨과 만족 그리고 감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오직 복음의 통로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내게 일어나기 쉬운 교만이라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는 이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준비를 잘 갖추게 되며,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관심이 훨씬 적어질 것입니다. 복음을 전달하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크면 클수록 복음은 감소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진리는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큰 용기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복음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곧 이 세상에 복음을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집에서나 사무실에서 아주 반가운 소식이 담겨있는 편지나 전보를 받습니다. 배달부는 그 편지나 전보에 무슨 소식이 담겨있는지 별로 관심이 없고 그저 전달해 주는 것으로 그의 사명을 다 한 것입니다. 왜요? 그 편지나 전보는 배달부가 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배달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체없이 전달해 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회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그대로 그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1~12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로 생각하면 우리 자신의 부족한 점을 언제나 깨닫고 이를 회개하고 우리의 심령을 깨끗이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가운데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보세요,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바 있는 약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는 전도 여행 때 어려움을 참지 못해서 말하자면 패잔병으로 집에 돌아갔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람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데 가편투표를 썼던, 말하자면 살인자였습니다. 세리 마태같이 그 당시의 빈축의 대상이었던 사람을 주님께서는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였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는 동안에 적들은 강력한 반격을 도모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8절까지를 보세요. “그러나 유대인들을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한지라”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려 할 때 큰 반대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반대가 일어날 때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적이 반대할 때 그것은 곧 우리가 옳은 길로 행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알고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 사업은 마귀가 미워하고 싫어해서 어떻게 하든지 중지시키려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용기를 내셔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말하자면 마귀와 격렬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싸운다는 것은 복음 전파 사업이 그만큼 활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맥없이 잠을 자고 있다면 마귀도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마귀와의 싸움을 기뻐합시다.

이것 보세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이 선한 사업을 마귀들은 어떻게 해석했어요? 본문 6절에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복음이 그만큼 세상에 뚜렷한 영향력을 미친다고 하는 간접적인 증명도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다이내믹한 영향력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이 위대한 사업, 그러면서도 어려움이 많은 복음 전파 사업을 위해서 한마음이 된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는 이 위대한 사명을 맡았습니다.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한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가 우리에게 가장 우선이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급한 사명임을 깨달아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일을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일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갈라놓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합니다. 이 꾀임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100년이 지났습니다. 2세기를 맞은 교회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만큼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을 정도의 일을 합니까? 혹 교회가 있으나마나한 존재입니까? 두려움의 대상입니까? 빈축의 대상입니까? 초대교회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적까지도 그들의 사업의 성공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영접했지만 그 성내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과 그의 일행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바울의 일행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베뢰아 지방에서는 바울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문 11~12절을 보세요.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 하나” 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마음이 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을 들을 때 즉시 그 복음을 받아들였고 열심히 듣고 배우려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들은 복음을 거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귀가 눈을 가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사도 바울은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 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반대에 직면할 때마다 그 사람의 마음을 가리운 블라인드를 치워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복음에 대하여 왜 마음의 문이 닫힙니까? 육신의 일을 좇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5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육신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영에 대하여 말해 보았자 들릴 수가 없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왜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합니까? 호기심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호기심이 있는데 좋은 방면의 호기심은 건설적이고 발전적이고 창의적이며 인류 역사에 공헌하는 바가 크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와 반대로 곁길에 흥미를 느끼며 삶의 우회로를 탐험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호기심 때문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6).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좁고 험한 길이요, 얼른 볼 때 시대에 뒤떨어지고 너무 엄격한 것만 같아 보이지만, 죄악의 길은 그 길이 넓고 멋지고 매력 있게 보입니다. 죄가 우리 인간의 옛 본성에 호소력을 갖는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증거할 때 우리는 받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의 어두운 길의 종말을 볼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밝은 길을 걸으려는 욕망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복음을 받지 아니합니까? 육신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7~8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북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이라” 했습니다.

육신적인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끈질기게 하나님과 대적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반항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향하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 어서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1.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사랑의 햇빛을 왜 버리고 점점 더 멀리가나

2. 고달파 지친 자 쉬라시네 쉬라시네 쉬라시네

무거운 짐진 자 다 나오라 쉬게 해 주시리라

3. 주께서 지금도 기다리네 기다리네 기다리네

죄짐을 가지고 다 나오라 어서 주 앞에 오라

4. 주님의 소리를 들어보라 들어보라 들어보라

그 이름 믿는 자 복 받으리 어서 곧 일어나라

(후렴)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오라

사도 바울이 전도하는 일에 온갖 형태의 반대를 받아 왔지만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려는 솔직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성령을 최종적인 권위로 보는 사람들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여 관심이 큽니다. 인간에 관한 끝없는 이론을 듣는 일에 염증을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그렇게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사적인 교인들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 모두가 베뢰아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연구하며 배우며 행하는 신사적인 교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