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박조준목사 설교

[박조준목사] 주님이 주시는 자유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에 전혀 예기치 않았던 몇 가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쉴 수 없는 전도 여행에서 그 몸이 지쳐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 피곤해진 심신을 쉬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우리의 영적인 밧데리를 충전시키기 위해 때때로 휴식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자동차도 연료 탱크에 연료를 넣고 달려야지 그렇지 아니하고 계속 달리기만 하면 결국 그 자동차는 연료가 다 떨어져서 멎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휴식과 긴장 완화의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높은 사기와 열의를 가진 사람일수록 잘 지켜지지 않는 원리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루만 쉬는 것도 주님께 대한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균형 있는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균형이 깨어질 때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고향에 돌아와 형제들과 교제하며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인데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본문 1절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몇 사람뿐이었지만 논쟁은 격렬하게 발전되었습니다.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꼭 사람이 많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직면했던 상황이 바로 그랬었습니다. 유대에서 안디옥으로 건너온 사람들은 사람이 율법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이론을 가지고 왔습니다. 유대인들의 대다수는 유대 민족의 위대함과 영광을 재복귀시켜 줄 메시아를 고대해 왔었습니다. 안디옥으로 온 사람들은 만일에 그들이 형식적인 율법을 그리스도인의 복음의 일부로 만든다면 그것이 여러 사람에게 널리 전파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복음이 왜곡되는 과오를 범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디옥은 말하자면 그들의 전파의 핵심지였습니다. 안디옥은 전도하는 교회의 사령부격이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안디옥교회에 인식을 시키면 그밖의 교회는 그다지 문제시되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편견이 있고, 오래된 편견이나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아니합니다. 오늘 교회에는 참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의를 행해야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이미 버린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얻는 선물인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다 그렇게 믿습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무슨 점수제로 운영하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선한 일을 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시는 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에는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입니다.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는 더욱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다른 데 보면 ‘원수 된 우리를’)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요한1서 4장 10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불변하십니다. 조건이나 환경, 기분에 따라서 달라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강한 사랑입니다. 견고한 사랑입니다. 안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는 부족하기 때문에 나의 어떤 견해나 습관 심지어 효험이 있을 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어하고 심지어는 강요하게까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좋은 습관은 그래도 괜찮지만 나쁜 습관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깅을 아침마다 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건강에 조깅 이상 좋은 것이 없다고 권합니다. 그런데 마약 중독자들은 다른 사람들도 마약 중독이 되게 하려고 애씁니다.

내가 하는 생각, 습관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너무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다른 책이나 신문 읽기 전에 성경을 한 시간 정도 정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매일 아침 두 시간을 기도하는 일과 성경 공부하는 일로 보내는 습관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거룩한 습관’(Holy habit)이라고 합니다. 매우 신앙 생활에 유익한 습관입니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사람이 누구나 다 예수 믿으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의 형편이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분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하루에 한 구절씩의 성경을 꼭 따로 외우는 좋은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믿는 사람이 다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한 구절 읽고 그 다음 구절 읽으면 그 전의 구절은 이미 잊어버리고 마는데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각기 다른 조건과 환경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꼭 같은 방법으로 하시지 아니합니다. 성경의 원리는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그 적용 방법은 보편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과 다른 사람이 하는 방법이 같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교회들의 교제 생활에서 이같은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그는 자기를 돌로 치려는 사람들과 마주하였을 때나 그를 감옥에 가두려는 음모에 봉착했을 때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새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의 안녕이 문제시되었을 때는 단호히 대응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세요.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만으로써는 세상을 복음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믿게 된 사람들의 역할이나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그들이 처한 바로 그곳에서 바로 전도자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새 신자들을 위해 바울이 근심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친밀하게 사귀고, 소중하게 사랑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할 때,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살전 2:7~8)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5장 1절에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메우려고 하는 멍에를 단호하게 배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지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라고 명하신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바울은 늘 그 명령을 잊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니 예루살렘 회의에서 문제가 분명히 제시되었습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면서 장로와 사도들은 서로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자기가 고넬료의 집을 방문했던 일을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토론과 비평을 나눈 뒤 사도들과 장로들은 안디옥과 사마리아와 길리기아의 이방인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는 이방인들에게 몇 가지 근본적인 규율을 지키는 것 외에는 억지로 율법을 지키게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본문 15장 28~29절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사도들과 장로들, 그리고 믿는 형제들 모두가 여기에 동의하였고, 논쟁은 해결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배울 것이 있습니다.

첫째, 문제가 생겼을 때는 공개적으로 다루는 일입니다.

믿는 형제들이 이방인은 먼저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은 후에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안건을 가지고 안디옥에 왔을 때, 바나바와 바울은 지혜롭게 행동했습니다. 먼저 그 사람들과 논쟁하지 아니하고 공개적인 자리를 마련하고 안건으로 토의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공개 토론에 제시하고 문제를 정직하고 공평하게 토론하여,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교회는 유언비어로 문제가 오히려 복잡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만일 우리 형제에게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그 형제에게 찾아가세요. 그에 관해서 말하지 말고, 그에게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화평을 위해서는 힘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적극적으로 노력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때로는 의견을 달리할 때도 있지만 서로가 화평을 위해서 힘쓰면 자비와 사랑과 이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것을 알리요” 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외부 환경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대기 오염, 환경 오염, 물의 오염, 그밖의 여러 가지 오염에서 벗어나려 여러 가지 노력을 하여 환경이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인간 자기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 말씀에도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문제가 바로 그와 같은 것이어서 우리 마음속에서 악이 생겨난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외부적인 훌륭한 해결책이 있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해답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마음의 근원을 깨끗이 하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썩고 부패한 우리 마음의 근원을 깨끗이 하는 길입니다.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생활 주변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하여 새 사람이 된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에 기적을 일으킵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26절에 보면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영적인 전쟁에 참가한 경험이 있었고, 용감하고 단련되고 확신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의 교회에도 이런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어떤 위험도 개의치 않는 강건한 믿음의 소유자들을 하나님은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 스스로 한 번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나?” 이것이 곧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어떤 불편이나 어려움 그리고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 “주님을 따르면 명예를 얻고 돈을 벌고 건강해지고 세상 만사 형통한다면 따를 마음이 있지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할 때 과연 내가 따를 수 있을까?”

다윗은 자기에게 아무런 희생도 없이 얻은 것, 다시 말해 값없이 얻은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값없이 따를 수는 없습니다.

“나는 주님께 나의 큰 마음을 드리는가? 그렇지 않으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반만 드리는가? 나는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바울과 바나바, 유다와 그리고 실라 이 편지를 전달한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기들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어 내려가다가 보면 믿기 어려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생각한 대로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들에게 제물을 드리며 신으로 생각하고 제사를 하려 할 때 펄펄 뛰면서 그것을 말리고 자기들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인 것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6절 이하에 보면 그들이 서로 다투며 갈라짐으로써 그들도 인간임을 재증명하는 격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지내야 실망을 덜 하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투게 되고 갈라서게 된 실마리는 바울의 제안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본문 36절에 보면 “수 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고 했습니다.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지금쯤 얼마나 그들의 믿음이 자라고 신앙을 지키며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장차 하늘 나라에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 사는 동안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 천국 시민의 자격을 구비하게 하는 데도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에 관해서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안디옥을 방문한 일은 그의 두 번째 전도 여행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면으로 보면 그것은 진정한 전도 여행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나바의 생각에는 전도 여행이라는 것은 한 번도 복음에 대해서 들어 본 일도 없는 사람을 찾아가서 전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새 땅을 일구고, 새로운 사람을 정하고, 새로운 지역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했던 것은 이미 복음을 받아 믿는 사람들을 굳게 해주고 권면하기 위해서 여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새로 믿는 사람들이 그 교회의 전도 사업이 잘 되느냐 잘 되지 못하느냐 하는 성패의 관건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초신자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은 잠언 27장 23절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아가서 7장 12절에도 솔로몬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이것은 목회자의 심정이요 자세입니다. 말씀이 전파되었으면 그 말씀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보살펴서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와 생각이 달랐습니다. 우리는 기회 주시는 대로 말씀을 전파하면 그것으로 다 되고 그 후에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니까 전도자는 한 번 갔던 곳은 다시 가 볼 필요도 없고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아직 미개척지가 많고 많은데, 어떻게 이미 다녀온 곳까지 다시 돌아 볼 여유가 있느냐는 주장입니다. 두 사람의 주장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마음이 섭섭해서 떠났던 그의 사촌 마가를 데리고 가서 다시 한 번 전도 여행의 기회를 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여기서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이 또 엇갈리게 되었습니다.

본문 15장 38~41절에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를 떠나 한 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과 바나바는 같은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면서도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의 사촌 마가와 함께 떠났는데 왜 바울은 실라를 택했을까요? 실라는 주 예수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에서 자기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을 원했습니다. 실라는 이미 불같은 시련 아래에서도 신실하고 용기 있는 사람인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로마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아마 로마 시민을 동행시키는 것이 로마 제국을 복음화하려는 전략에 여러 면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졌습니다. 결국은 다투고 헤어졌습니다. 그 중에 누가 옳았습니까? 둘이 다 옳습니다. 마가는 분명히 두 번째의 기회를 얻을 자격을 얻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은 전도 사업에서 마가와 같이 봉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했습니다. 나중에 사복음서 중에 하나를 기록할 만큼 마가가 유익한 일을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과거에 떠나 버린 사람을 다시 한 번 믿어 보는 것은 상당한 위험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아주 다른 기질, 전혀 다른 성격, 그리고 전도 방법에까지 큰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다 하나님 나라에 유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나바의 마음은 젊은 마가에 대한 사랑과 자비로 가득했고, 바울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격심한 논쟁이 있기는 했지만 사탄은 그들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바울은 실라와, 바나바는 마가와 각각 전도의 활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각자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때로는 마찰도 있을 수 있고 분열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비난할 것 없이 서로가 맡은 사명에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는 꼭 같은 축복을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람 사이에 교리나 제도, 그 밖의 다른 이유로 인해 다툼이 일어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의 통일성을 유지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박조준목사] 주님이 주시는 자유 < 박조준목사 설교 < 기사본문 - 뉴스포유 (newsforyou.kr)

 

[박조준목사] 주님이 주시는 자유 - 뉴스포유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에 전혀 예기치 않았던 몇 가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쉴 수 없는 전도 여행에서 그 몸이 지쳐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 피곤해진 심신을

www.newsforyou.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