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1~16
사도행전 4장은 바나바라는 사람이 사도들 앞에 헌금하는 이야기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하게 되는 사도행전 5장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헌금을 드리는 이야기로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같은 헌금을 드리는 일이면서도 여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주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 소유를 교회에 바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고 싶어도 헌금 내는 것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못 가겠다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구원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헌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에 대하여 감사와 감격 속에서 드리는 우리의 성의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성의를 나타내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지만, 세상에서는 가장 귀한 것은 시간과 정력과 지식과 모든 경험을 다 동원해서 얻은 물질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우리의 정성의 표로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교회 생활을 통해서 보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온전히 마음을 다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그들의 삶과 그들이 가진 것의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바치기를 원합니다. 바나바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 보면 비록 그 수는 적지만 언제나 하나님께 헌신하는 남종과 여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의 전적인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귀하신 섭리를 이룩하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부부였는데, 그들도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적인 헌신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오로지 진실하고 헌신하는 부부라는 이름만을 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달랐습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인위적인 계획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받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는 위선이라는 위험입니다.
주님은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은 지극히 사랑하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반면에 사람을 속이는 위선자들은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우리가 하기로 약속한 것을 어기거나 하지 않은 일을 한 것처럼 꾸미는 것은 위선입니다.
전도서 5장 4~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했습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진리를 말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거짓된 것을 싫어하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밭을 팔아 그 값의 절반을 가져다 사도들의 발 앞에 놓으면서 전부라고 속였습니다. 절반을 드리면서 전부 드리는 자의 영광을 누리려 한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언제나 진실을 말해야만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위한 훈계입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보십시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에 기계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나 안 지을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시험을 하지만 나를 죄 짓게 유혹할 수는 있어도 억지로 죄를 범하도록 강요하지는 못합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결정을 내리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시험의 마수가 뻗쳐 올 때는 언제나 피할 길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보세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귀를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시험할 수는 있지만, 시험에 드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결단에 의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의 경우를 보세요. 마귀들이 그처럼 강하게 공격해 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더 확장되어 갔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때, 교회가 성장할 때 제일 싫어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마귀입니다. 본문 17~18절에 “대제사장들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어떻게 할까 고심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도들의 전도 사업을 방해할까 했으나 이것처럼 잘못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대적하는 사람에게 멸망의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일이나 발뒤꿈치로 가시채를 차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과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사두개인들이 이 길을 택했을까요? 시기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저 평범하고 정직하고 쉬운 말을 하는 사도들에게 인심이 쏠리는 것을 볼 때 시기심이 불타 올라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시기심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두어 버려 고통을 주려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 사도들을 풀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성전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21절에 보니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 오라 하니” 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산헤드린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위엄이 있고 권위있고 존경받는 단체였습니다. 그들의 세력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냉엄하고도 비난에 찬 눈길로 대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어요. 사도들이 분명히 감옥에 갇혀있는 줄로 알았는데,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본문 22절 이하를 보세요.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 한 사람도 없다 하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사람들을 가르치더이다” 했습니다.
여러분, 사도들은 위험스러운 처지에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왜 도망하거나 피하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사명도 그런 의미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이 말씀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는 것이 곧 그의 생활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무엇을 보든지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마태복음 9장 36~38절을 보세요.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추수할 것이 많다고 보셨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보실 때 무심코 보신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 심령이 추수 때가 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무르익은 광대한 추수밭을 보십니까?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신령한 밭을 보세요. 어디에 가나 추수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가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염려하지 말라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받을 것이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종들이 주의 복음을 전파할 때 당할 어려움을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둘째, 복음 증거를 위해서는 투쟁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선과 악, 의와 불의, 마귀와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악과 마귀와 거짓과 불의와 싸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왜 복음을 증거하는 데 투쟁 정신이 필요합니까?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빌립보서 3장 14절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라고 한 말씀의 뜻은 “푯대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가노라” 하는 뜻도 아니고, “푯대를 향하여 표류하노라,” 혹은 “푯대를 향하여 산책하노라”도 아닙니다. 바울의 말은, “내가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 하였습니다. “좇아간다”는 말은 언제나 저항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 전파는 “선한 싸움”인 것입니다.
셋째, 복음 증거에는 일꾼으로서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일꾼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추수하는 것에는 반드시 때가 있기 때문에 그때를 놓치지 않고 해야 합니다. 머뭇거리다가 때를 놓치면 아무 것도 거둘 수 없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추수하는 일꾼으로 추수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얼마나 수고했는지 모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4~28절을 보세요. 그가 그처럼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면서도 오로지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가롭게 쉬는 사람으로 택함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팔을 걷어붙이고 뜨겁고 먼지나는 밭으로 일하러 나아가야 합니다. 일하되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열심을 품고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한 대로 상급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넷째, 복음의 증거를 위하여 장비를 사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진 재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장비가 무엇입니까?
① 심령의 추수를 위해서 필요한 첫째 장비는 우리 마음 안에 거하시는 성령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심령을 하나님 앞으로 거두어 들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도와주신 것 같은 방식으로 오늘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이 함께 하실 때에 능력 있는 전도자로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할 수가 있습니다.
② 그리고 둘째 장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거듭나야 하므로 우리의 첫째 책임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히 4:12)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③ 우리의 셋째 장비는 복음 그 자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이 복음이 귀에 들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매스컴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천사가 사도들을 감옥에서 풀어주면서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가서 사람들에게 너희의 변화된 삶을 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눈으로 봄으로써가 아니라 우선은 들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복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물건을 잘 모르는 사람이 물건을 팔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④ 복음 전파의 넷째 장비는 기도입니다.
성경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기도하지 아니하고 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여러분, 기독교 이천년 역사를 통해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도하지 아니하고 복음이 전파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첫 장에도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임하게 되었고, 저희가 능력을 얻게 되었고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때 하루에 삼천명씩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복음 전파하는 사람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없는 누구에게나 전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무식하거나 유식하거나, 권력이 없거나 권력이 있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사람의 마음 모두가 전도 지역입니다. 따라서 누가 전도해야 하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전문적인 전도인만이 전도할 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전도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세요. 이상적인 전도의 정신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와 같은 훌륭한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한번 설교에 삼천명씩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하자면 전도에 있어서 수퍼스타와 같은 존재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이와 같은 수퍼스타에 의해서만 복음이 전파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증거를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소유한 사람은 누구나 다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도행전 8장 4절에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 흩어진 사람들은 모두가 평신도들이었습니다. 식사 시중을 들고 있던 빌립도 전도자의 정신을 가지고 살았고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와” 접촉하게 되었을 때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에디오피아의 내시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다”(행 8:35)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리스도를 소유했다면 온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생각해야 합니다. 엄격히 말하면 복음 전파 사업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외국에 파송되고 개척 전도를 위해서 지방에 파송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사무실에, 가게에, 시장에, 학교에, 공장에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전도자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까? 그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어디서 계시든지 능력 있는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산헤드린은 제자들이 성전에서 복음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회 앞에 불러 놓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공갈을 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대답한 것을 보세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29~32).
얼마나 침착하고 얼마나 담대했습니까? 대제사장은 베드로의 대답에 권위와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때린 뒤 예수의 이름을 다시는 발설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41~42절).
오늘 우리에게도 이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박조준목사] 복음을 증거하라 < 박조준목사 설교 < 기사본문 - 뉴스포유 (newsforyo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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