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1~10, 54~60
늘 읽은 말씀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입니다. 거짓 증인들이 산헤드린 앞에서 스데반 집사님을 불경죄로 고소하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스데반을 처리하는 데 여러 말 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스데반에게 고소의 내용이 참인가 그렇지 않으면 거짓인가를 물어볼 뿐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1절).
그때 스데반은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에서 그처럼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조리있게, 명확하게, 담대하게 나오는지 주변의 사람들이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가득히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쏟아 붓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마음의 풍성함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부요를 나눠주는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비의 사자였습니다. 그는 말씀으로 훈련받고, 전도를 위한 장비를 갖추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업에 전적으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이 세상을 위해서 전적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이처럼 훌륭하게 훈련된 그리스도인들이 별로 많지 못합니다. 준비가 갖추어져 있지 못합니다. 단련도 되어있지 못합니다. 교회에 출석은 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의 일만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성경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신자의 수는 천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국민 네 사람만 모이면 그 중에 한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인 셈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축복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제는 어디 가나 예수 믿는다는 말이 누구에게나 생소하게 들리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정말 훈련이 잘 되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하고 전도하는 일을 위해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우리 한국교회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활력을 발전시키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우선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하려고 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주님을 온전히 따르려는 각오를 가지고 주님의 뜻이면 무엇이든지 순종하려는 마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5장 29절에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사도들은 말했습니다. 복음서에 보아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났고, 감격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한 상태를 올바르게 채우시도록 우리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셔야 합니다. 주님께 맡길 때 실패가 없습니다. 주님만 따라가면 곁길로 나갈 염려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맡기고 사는 사람의 마음엔 언제나 평화가 있고 담대함이 있고, 기쁨이 있고, 승리가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할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힘을 주시고, 소망과 믿음을 안겨 주십니다.
더구나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도구인 말씀과 기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신 것처럼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찬양이 우리 입에서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혹시 범죄했을 때는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부여된 특권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나 혼자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믿습니까?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을 깨우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시편 기자는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 119:25)하고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탐구하셔야 합니다.
목사의 설교를 들으실 때도 요점을 메모해서 그 말씀을 명상하며 기도하며 그 말씀을 삶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생각나면 읽고 바쁘면 그만두고 하지 말고 매일 매일 계획을 세워서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모이는 성경 연구 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교회 밖에서 모일 때는 그 모임을 주도하는 분이 그리스도 중심인지 사람 중심인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잘못된 데 가담하면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말세에 일어날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말해 내려가다가 5절 이하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하면서 계속해서 주신 말씀이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지요? 성경 공부하는 것은 좋은데 성경 공부한다고 모이는 곳이 다 좋은 곳은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성경을 체계 있게 외우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성경을 외움으로 성령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시게 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생활에 도움이 되는 말씀이나 다른 사람을 돕는 데 필요한 말씀들을 우리 마음속에 기억나게 하심으로, 그때 그때에 생각나게 하심으로 새롭게 하시고 힘이 되게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십자가의 강한 군병이 되게 하여 승리할 수 있게 하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훌륭한 요리사의 일과도 비슷합니다. 훌륭한 요리사는 여러 가지 재료를 가지고 맛있고 영양 있는 요리를 합니다. 고기, 파, 마늘, 고추, 후추, 참기름 그밖의 갖은 양념을 가지고 요리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훌륭한 요리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충분한 재료, 싱싱한 것을 가지고 요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훌륭한 요리사는 남은 재료를 가지고 맛있는 요리를 할 수가 있습니다. 웬만한 요리사는 좋은 재료, 신선한 재료를 가지고 훌륭한 음식을 요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좋은 재료를 가지고 만드시는 경우가 별로 없으십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찌꺼기 같은 재료를 가지시고 일을 하셔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생이 그 좋은 시절은 자기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세상과 육신을 위해 살다가 상할 대로 상하고 찢어지고 지치고 조각난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찌꺼기 같은 우리를 통해 맛있는 음식을 만드시고, 깨어진 조각들을 다시 붙여서 아름다운 예술품을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요긴하게 사용하시는 도구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경우를 보세요. 스데반은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능력 있게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읽고, 듣고, 외우고, 묵상하는 데에 시간을 쓴다면 그것은 절대로 후회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대로 그와 같은 설교를 할 수 있었던 스데반은 반드시 많은 시간을 바쳐서 성경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많은 부분을 외우고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성경에 유식한 사두개인 앞에서 성경을 변론한 것을 보면 그의 성경 지식은 보통 이상이었던 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 스데반의 설교 중에서 깊은 교훈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모세의 생애를 통한 교훈입니다.
본문 22~25절을 보십시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무슨 일을 행하기 전에 사실을 미리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의 지식을 다 배웠고 그 말과 행사가 능했습니다. 애국 애족의 마음이 투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동족들이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닫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중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그저 단순히, 순수한 마음으로 애굽인 감독이 그의 동족을 학대하는 것을 볼 때 격분해서 거친 행동을 하였습니다.
지도자의 시련 중에 하나는 종종 완전한 증거 없이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서두르다가 실패를 초래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모세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든지 시간을 들여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사실을 알고, 관련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기도한 다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온 세상 인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그들만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설교를 통해서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하나님을 전파해야 할 사람들인 것을 성경 말씀을 들어 사두개인들에게 제시했습니다. 스데반은 그리스도인의 지상 명령의 관점에서 구약성경을 해석한 것입니다. 매우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관심을 받는 유일한 민족이며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관심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믿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의 설교를 통해서 유대 민족의 역사를 형성하는 위대하고 거룩한 사건들의 대부분이 그들이 생각하는 거룩한 땅 이외의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 살고 있을 동안에 그를 준비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있을 동안에 나타나시어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해 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하나님은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율법도 거룩한 땅에서 주신 것이 아니라 광야의 시내산에서 주신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화려한 성전에 계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성전 안에 모시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의 설교를 통해서 그와 같은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했습니다. 오늘 본문 48~50절을 보세요.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하나님)는 손으로 지으신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솔로몬 왕의 경우를 보세요. 그는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27).
우리는 솔로몬 왕의 봉헌 기도를 통해서 그가 성전을 기도의 장소로 생각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고 나아와 기도할 수 있을 것을 그의 봉헌 기도 중에 말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8장 41~43절에 “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저희가 주의 광대한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은 거룩한 성전이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폐쇄적인 장소가 아닌 것을 설교를 통해 지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성전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완전히 오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목적까지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인류가 범죄한 이래 모든 나라, 세계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을 통해서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 보시고 계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만방의 족속들을 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 민족들은 그것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왜 그들이 존재하는지 그 이유까지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민족만을 위해서 하나님께 경배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6절을 보세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여기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를 통하여(사 45:22), 하박국 선지를 통하여(합 2:14), 말라기 선지를 통하여(말 1:11) 계속 깨우쳤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의 비극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에 대하여 한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저희들은 저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기대와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까? 그저 한 주일에 한두 번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며 시간을 바치고 주일 예배 때 몇 푼의 헌금을 드리면 그것으로 우리의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향하신 기대와 뜻은 옛날보다도 한층 더 뚜렷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세상에,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마음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고 저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것뿐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곳의 필요도 우리가 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려운 문제의 해답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스데반의 설교 내용을 보세요. 52절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하였습니다. 여기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자유인이나 노예, 모두에게 구세주가 되심을 주장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목적에 대해서 무지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성령을 거역하고 선지자들을 핍박하였습니다. 마침내는 메시아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스데반은 그들을 가리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요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한 민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신뢰를 저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희에게 부여된 영광을 포기하는 결과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불행한 일은 다시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57~60절). 스데반은 정말 위대한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그는 그 당시 어느 누구보다도 상황을 명확하게 통찰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그때의 모든 일을 주동한 사람이 다소 사람 사울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크게 충격을 받게 하셨으며 그의 죽음을 목격할 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을 깊이 느끼게 하셨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마음에 새로운 세계관의 출발을 촉구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는 바울이라는 이름을 새로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크게 일하는 종으로 세움을 받게까지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신실한 종 스데반은 악한 사람들의 돌에 맞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얼른 생각할 때 하나님의 사람의 패배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처음에 패배로 보였던 것이 영원한 승리로 변합니다. 때로는 불가피한 후퇴가 궁극적으로 주님을 위한 전진의 결과를 낳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데반의 순교가 바로 그렇다고 믿습니다. 바로 그 날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세계 역사상 그리스도의 군대에서 가장 크게 일할 다소 사람 사울의 마음에 무엇인가 씨를 뿌리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수백 만의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의 한정된 이성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을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은 유대인만이 소유한 분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구주이심을 외치며 죽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온 세상에 마음을 두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종 스데반은 이 일을 위하여 말씀으로 준비했고, 항상 기도했으며, 복음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기꺼이 바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예나 지금이나 역사하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일을 위하여 스데반처럼 나서시겠습니까?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박조준목사] 스데반의 감동적 설교 < 박조준목사 설교 < 기사본문 - 뉴스포유 (newsforyo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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