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1~10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사도들의 생활 가운데서 귀한 본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그때 예수님을 믿은 제자의 수가 많아지게 되니까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혼자 된 부인들이 어렵게 지내는데 매일 구제하는 일에 빠지는 것 때문에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제하는 일을 어떻게 편벽되게 할 수 있느냐?”하는 것으로 시비가 일어났던 모양입니다. “누구는 돕고 누구는 돕지 않느냐?” 하면서 “사도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여론이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여론을 접한 사도들은 믿는 사람들을 불러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전파의 책임을 맡은 목회자는 여기에 직접 관계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목회자가 교회 재정에 너무 깊이 관여하면 꼭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제직회가 있는 것입니다. 제직회에서는 교회 재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말씀 전파와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들은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가급적이면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이 아주 좋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의 생활이 바쁘다 보니까 자칫하면 잊어버리고 지나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에 나오는 다니엘을 기억하시지요? 그는 자기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기도 시간을 꼭 지켰습니다. 다니엘 6장 10절에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했습니다.
“이 조서에 어인이 찍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남달리 그 마음이 민첩해서 다리오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때 다리오 왕이 통치한 나라는 120도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총리 셋을 두었습니다. 그 가운데 다니엘은 수석 총리로서 전국을 다스렸습니다.
이를 시기한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흠을 잡을 것이 없으니까 연구해 낸 것이 다니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니 하나님의 율법으로 올가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요새 말로 초비상 계엄령을 공포하여 “30일 동안 누구를 막론하고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나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넣는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이 사람들이 이런 법령을 제정하려고 했는지 아시겠지요? 다니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요, 하루에 세 번씩 꼭 하나님께 기도 드린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귀들이 얼마나 영리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리오 왕은 그것이 자기에게 대한 충성인 줄로만 알고 이 조서에 어인을 찍었습니다.
일단 어인을 찍으면 왕 자신도 절대로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이 법령이 파사 나라 전국에 공포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부터 30일 간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일에 그 법을 어기면 누구나 사자 굴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은 그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생명을 내걸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능력 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위대하신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므로 위대해졌고, 능력 있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므로 능력의 사람이 되었고, 지혜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므로 지혜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파사 나라에서 다리오 왕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책임이 컸습니다. 아마 그의 일과 중에 많은 부분을 결재하는 일로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방 장관들을 비롯하여 내외 인사를 접견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매일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루에 세 번, 집에 가서 기도하는 시간을 그의 일과로 정했습니다. 일이 바빠서 밥을 한 끼 거르는 한이 있어도 집에 돌아가 기도하는 시간만은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시편 55편 17절에 다윗은 말하기를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기도 시간을 정해 놓는다는 것은 형식주의적인 틀에 우리를 얽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충실할 수 있기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은 모두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스스로 물어 보십시다. “내가 기도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어느 때가 가장 좋을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겨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기도 시간에 기도 장소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쉬운 말로 기도에는 외상이 없습니다. 기도하면 무엇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2~3절을 보니 이렇게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베드로와 요한 앞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보통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여보시오, 제발 우리를 귀찮게 굴지 마세요. 우리는 지금 기도하러 가는 중이에요. 시간이 다 되었어요. 시간에 늦으면 안 되니까, 지금은 안 돼요. 우리는 지금 꽉 짜인 시간 계획이 있으니까 번거롭게 그러지 마세요.”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시면 아시게 되겠지만 그는 전혀 다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여유있게 대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3년이라는 세월을 지내는 동안에 이와 같은 생활 방식이 몸에 배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다니면서 혈루증으로 시달리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와서 만짐으로 나음을 얻게 되고 예수님의 일행의 길을 잠시나마 멈추게 한 사실을 경험했었습니다. 벳새다 뜰에 시장한 무리에게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도 눈으로 보았습니다.
“다윗의 아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쫓아오는 눈 먼 거지도 만났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던 사실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던 일을 중단하거나 계획했던 것을 때에 따라서 변동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때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는 언제나 유연하여야 한다는 것을 교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우리의 삶의 질서를 유지하여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융통성 없이 엄격하고, 빈틈없이 고정된 고집이 되지는 않아야 할 것입니다. 질서 있는 삶의 틀을 통해 확실한 목표를 세워 전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목표들을 부드럽고 유연한 태도로 감싸야 합니다.
강물은 바다를 향해 흘러 내려갑니다. 그러나 강물은 지형을 따라 흘러 내려갑니다. 직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구불구불 돌아 내려갑니다. 댐으로 막으면 막혀서 내려가지 못하고 잠시 머뭅니다. 그러나 머물면 머물수록 더욱 크고 강한 힘이 축척됩니다. 그래서 무서운 힘으로 쏟아져 내려갑니다. 강물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와 같은 유연성이 꼭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강철은 유연성이 없기 때문에 부딪치면 부러집니다. 그러나 물은 부러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물의 힘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온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교훈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목표 위주의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생명 위주의 사람입니다. 대개 보면 서구 사람들은 목표 위주가 되기 쉽고,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보다 인간 위주의 경향이 큽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은 늘 그들의 마음에 부각되었고 뜨겁게 불타 올랐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으라.” 세상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야만 합니다. 땅끝까지 모든 사람들을 인도하고 제자로 삼아야만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확실한 이상과 목표를 가지고 전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세요.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나이 들고 걷지도 못하며 구걸이나 하며 사는 사람은 장애물처럼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걸음을 멈추고 “이 사람의 어려움을 처리해 주는 것은 어떠한 유익이 있겠는가? 이 무기력한 노인이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가치가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오는 대로,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제사장과 율법학자가 했던 것처럼, 베드로도 “옆길로 피하여 지나갔을”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파하려는 비전을 쟁취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저도 그와 같은 비전을 갖고 그 원대하고 영광스러운 목적을 위해 삶을 바쳐 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목표 위주가 되어서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실제 도움과 격려가 필요한 사람까지도 지나쳐 버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가 장차 하늘나라에 가게 될 것인데 그때에는 어느 것이나, 무엇이나, 모든 것이 다 분명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의 계획과 목표 달성만으로 몸을 감싸버리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내 목표를 달성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진정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활 방식과는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가 주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하는 데는 쓸모없이 보일지 몰라도, 베드로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앉은뱅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던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는 가난한 사람이었으나 그가 준 것은 돈보다 훨씬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는 앉은뱅이에게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돈 몇 푼을 주어 식사를 한 번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서서 걸으며 뛰어다니며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기적입니다. 기독교는 구제를 합니다. 그러나 구제가 아니라 그 심령이 구원받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으니 모든 사람들이 보고 놀라며 베드로에게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낫게 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것을 부인했습니다. 3장 12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들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여러분, 이 얼마나 겸손한 말입니까? 만일 베드로가 그 교묘한 시험에 빠졌다면 그의 전파 사업은 그때 거기서 멈추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당연히 속한 영광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착각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8~19).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5:33). 여러분, 언제나 이 말씀을 마음판에 꼭 새기시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 놀라운 일이 있을 때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너희는 내 증인이 되라”는 이 말씀은 세월이 지나고 다른 긴급한 일이 있다 해도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이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증거의 좋은 기회로 삼았습니다.
저희는 정말 훌륭했습니다. 모든 기회를 증거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본문 19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며 베드로는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3장 3절에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했습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차를 타고 인생의 행로를 달리다가 교차로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어디에다 모실까요? 뒷자리에 모실까요? 운전석 옆에 모실까요? 우리 자신이 운전석 옆에 자리를 옮기고 예수님께 운전석을 내어 드립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길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운전하시는 대로 내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장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 뒤를 무조건 따라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단호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회개는 능동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믿게 되는 것은 수동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 답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왜 회개해야 합니까? 회개하지 아니하고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습니다. 회개해야 그 심령이 살고 교회가 부흥합니다. 회개는 우리가 가는 길이 잘못된 길이면 돌아서 바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길에서 돌아설 때 성경 말씀과 같이 죄 사함이 있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4절에 보면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죄 사함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살펴보아 우리의 잘못을 다 회개해야겠습니다. 남의 눈의 티를 뽑으려고 애쓰지 말고 내 눈의 들보를 빼기 위해서 먼저 애써야 되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께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과연 어떠한 길을 걸었던지, 어떤 잘못을 했던지 온전히 과거를 청산하고 참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의 속죄가 우리 마음속에 임할 것이고,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때 우리 마음속에 성령께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날이 우리 마음속에 임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주요 사건은 앉은뱅이를 고쳐 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전파하였습니다.
설교를 통해 베드로는 무리들을 믿음으로 한 걸음씩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앉은뱅이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으로 이 일을 행하였음을 확증하였습니다.
참을성 있게, 꾸준히, 그리고 열심 있게 베드로는 자기의 원대한 목표를 추구해 나갔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모든 무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끌었습니다. 베드로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했는지 모르지만 그의 생각과 마음은 사람들의 영혼에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이 구원과 영생의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여러 가지 문제로 가득 차 있으나, 우리에게는 베드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문제에 대한 참된 해답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믿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믿음에 확고히 설 때 우리는 세상에 축복을 전해 줄 수 있는 준비와 자격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기도의 사람, 융통성 있게 생활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겸손한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심령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이 넘치는 증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박조준목사] 일어나서 걸으라 < 박조준목사 설교 < 기사본문 - 뉴스포유 (newsforyo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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