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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목사 설교

[박조준목사] 성령의 놀라운 역사 - 뉴스포유

사도행전 2:1~4, 37~47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2장은 주님의 교회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이후 50일이 지난 오순절은 추수를 기념하는 절기인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즉 또 다른 의미의 추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루에 3천명의 영혼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구속 사업은 그때부터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주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시간이 막을 내릴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의 모든 일, 역사의 모든 사건들, 그리고 교회의 모든 일들이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일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점에서 실패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와 같은 집회 시간에는 우리가 세상의 필요를 예민하게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지상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직접 내 삶을 계획하고 결정 내리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삶의 자세를 고쳐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의 가치 있는 일에 재정적인 투자나 시간적인 투자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세상적인 어느 것도 우리가 최선을 다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합니다. 그렇다고 많은 돈을 벌어서 재벌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재벌이 된다고 해서 거기에 만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박사 학위를 받으려 온 정력을 다 기울입니다. 그렇다고 박사 학위를 다 받는 것도 아니고, 받는다고 해도 거기에 만족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의 보좌를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덤벼들지만 그렇다고 소망하는 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요, 얻어 봐도 별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은 바닷물 속의 해초와 같아서 밖에서 볼 때는 굉장해 보이지만 실상 얻고 보면 거기엔 만족이 없고 절망의 식은 재로 화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그 어느 것에도 우리가 최선을 다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시적인 목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엔 만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물질적인 존재이면서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천국 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적인 일들로 자신을 만족시키려 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또 우리 마음을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불태울 때, 우리 삶은 원래의 의미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은 그러한 삶을 찾았습니다.

사도들도 인간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능력의 한계가 있었고 의심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상상해 보세요. 제자들은 사랑하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모습을 보고 절망에 빠져 맥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그들을 격려하고 평화를 주시면서 그들은 40일 동안을 감격과 흥분 속에서 지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들의 마음에 어떠한 것들이 오갔는지 상상할 수가 있습니까? 그들은 주님께서 주신 위대한 명령에 대해 토론했을까요?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도들이 그 명령을 어떻게 수행해 나갈 것인지 생각해 보았을까요?

마태복음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마가복음 16장 15절에도 주님의 명령의 범위를 명확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했습니다.

누가는 주님의 명령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에 대해서 몇 가지 제시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5절 이하에서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했습니다.

요한의 기록을 보세요. 요한복음 20장 19~21절에,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희생의 값을 치러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시기에 앞서서 그의 손과 옆구리를 먼저 보이셨습니다.

왜 주님께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제자들이 치러야 할 값을 생생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앞날에 장밋빛 행복을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는 길은 한가롭게 산책하는 공원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에는 고난과 역경, 심지어 죽음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생각한 대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지상 명령의 전략을 위한 세부 사항을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임무의 중량이 너무 무거워 압도당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저희들이 이방에 복음을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이방 사람을 만나 본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그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세요.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외국의 방언으로 복음을 명확하게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무리 가운데는 비판자들이 있었습니다. 항상 이런 사람들은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 12~13절을 보세요.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놀라운 일을 행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조롱을 받을 때 화를 내거나 논쟁으로 빠지는 대신 성경 말씀만을 인용했습니다. 구약의 요엘서 2장 28~32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이때 베드로의 손에 그가 준비한 원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거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가 설교 준비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우뚝 서서 성경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베드로가 어디서 그 생각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주님에게서 배웠습니다.

예수님이 제소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을 때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성경에서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너희가 모세의 책 중에서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경을 인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인용함으로 비판자들에게 대답하셨고, 사도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늘 성경을 인용하여 교훈하시는 것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경 말씀을 많이 인용했습니다. 이처럼 성경 말씀은 사도들의 교제, 결정의 기도, 그리고 설교의 중심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말씀에 입각한 사람들이었고, 그 권위 아래서 생활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광경입니까? 얼마 전만 해도 고기잡이 배를 타고 다니던 평범한 사람, 소박한 어부 베드로가 값비싼 옷을 입은 제사장들과 학식 높은 서기관들과 간교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 그리고 시기심 많은 사두개인들을 마주보며 도시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복음의 진리가 예루살렘 거리에 울려 퍼졌습니다. 누구도 그와 같은 것을 들어 보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했습니다.

사실 생각하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예배 시간에 기도를 부탁해도 마음을 얼마나 졸이며 떠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 마무리를 하지 못해서 곤란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에 크게 힘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외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완전히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마귀가 고개를 들 수가 없고 이길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렇게 권능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섰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능력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설교에 권능이 있었던 것은 그가 복음만을 전파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사도행전 2장 22~24절을 보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요약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2~33).

베드로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본문 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베드로의 설교가 있은 후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본문 41절을 보세요.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고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볼 때 “위대한 인물이로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증인이로다”라고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보세요.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이 놀라운 역사를 행하신 이는 베드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가 조심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에 사람이 나타나기가 쉽습니다. 사람은 십자가 뒤에 숨겨지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역사하실 때 반드시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이 두 가지 원리를 깨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무거운 짐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사용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사도의 말씀을 듣고 성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본문 42절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의 교제의 첫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열심으로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 의심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배우려는 열심, 가르침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그리스도를 위해 쓰임받을 수 있는 중요한 열쇠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이 삼일기도회에 참석하시는 여러분의 모습을 볼 때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아 보려는 노력을 하시는 모습을 볼 때 저 자신이 감격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들어 쓰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가까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가까이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멀리 있는 사람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위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아니하면 성장할 수도 없고 쓰여질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가까이 계셔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들어 쓰실 것을 믿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항상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만찬의 교제와 기도, 그리고 찬송은 그들의 생활의 핵심이었습니다. 저희는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초대교회 교인들의 예배의 영이 불을 붙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의 모든 요소들이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이 산만하고 다른 일을 생각하고 우리의 영이 냉랭하면 그 예배는 헛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문자 그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온 정성과 힘을 다해서 정신을 집중해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잠시라도 틈을 주면 마귀가 가로채려고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한눈 팔 사이도 없이 모든 것을 집중해서 예배함으로 삶에 만족한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저희에게는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기쁨이란 우리에게 힘을 주는 요소가 됩니다. 그러므로 기뻐하는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 방면으로 도움을 얻고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것은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도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러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두 번째 열매가 기쁨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서로 사랑하며 동행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기쁨이 없다면 이것은 바른 신앙 생활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뻐하는 것은 내 마음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기뻐하고 감사할 것인가, 아니면 우울하게 살 것인가를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희생적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고 했습니다(44~45절).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구나, 저희는 주님의 말씀 안에 늘 거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에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무엇으로 증거합니까? 서로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주님과 동행함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하였습니다. 생활을 통해 열매 맺어야 합니다.

사도들은 여러 해 동안 제자 되는 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희의 과제는 단순히 사람들을 주님께로 데려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간곡하게 주신 말씀도 그의 양을 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의 마지막 편지에도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 42절에 보니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숙하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열심히 모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정성을 기울여 예배해야 합니다.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열심히 봉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날마다 날마다 자라나야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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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2장은 주님의 교회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이후 50일이 지난 오순절은 추수를 기념하는 절기인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즉 또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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