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1~12
성령이 충만한 초대교회는 날마다 달마다 부흥 성장했습니다.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마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귀는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싫어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이를 방해하고 저지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여 강하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파할 때 듣는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주 앞으로 돌아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수적으로도 부흥하고 영적으로도 성장해 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자, 마귀는 요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사도행전 4장 1~2절에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널리 주장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에 사도들의 말이 옳다면 그들의 설 땅은 없어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 보면 그들은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 구절을 보세요.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은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의 수가 남자만 5천이 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경우는 남자의 수와 여자의 수가 같습니다마는, 대개 교회의 경우 여자의 수가 4분의 3이고 남자의 수는 4분의 1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남자의 수만 가지고 수를 셀 때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적어도 2만명은 되었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자, 그러면 무엇이 이와 같은 성도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도록 하였습니까?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 준 일은 수천의 사람을 믿음으로 이끄는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인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던 이 일이 결국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 모든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그들은 자기들이 기도하러 가던 원래의 계획을 중단하고 불구자를 도와주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 일은 무엇이든지간에 그 일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하찮은 일을 통해서도 그의 영광을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이사야 55장 8~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만 따라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보세요. 앉은뱅이를 고쳐준 베드로와 요한은 그 일로 인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이적은 폭력과 핍박, 그리고 고난을 초래하게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매 맞는 것이 누구에게든 즐거움이 될 수 없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은 산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견디기 어려운 일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받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0~12)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이튿날 아침 베드로와 요한은 그 당시 권세 있는 간교한 사람들인 장로와 율법학자들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겪으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그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때, 그들이 당해야 할 위험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이 권세자들 앞에서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식 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의 단순한 메시지를 반박해서 입을 열 수 없게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사도들로 말하면 갈릴리 출신의 평범한 어부들로서 나사렛 출신 목수를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세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권위자들이 사도들을 향해서 물은 말을 보세요. 본문 4장 7절에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너희는 어떤 신비한 힘으로 이런 일을 행했으며, 무슨 권리로 그와 같은 힘을 사용하였느냐?”는 말입니다.
권위자들은 이 일로 베드로와 요한에게 율법대로 사형 선고를 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베드로는 두려움에 못 이겨서 자기의 선생님을 부인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본문 사도행전 4장 8~12절을 보면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합니다.
보세요. 베드로의 증거가 얼마나 분명하고 담대합니까? 성령은 베드로 사도를, 주님을 부인하던 사람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담대히 증거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사람으로 온전히 변화시켰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니 힘과 용기와 담력과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베드로의 삶을 높이 들어 올리셨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에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보세요. 이런 어려움을 당할 때 무슨 변명이나 방어의 수단을 썼습니까? 아무런 변명도, 방어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통해 보는 대로 성령의 역사는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사람의 삶에서 성령은 어떤 일을 합니까? 저희가 범한 죄를 확고하게 합니다. 향기가 우리에게는 좋습니다.봉접(蜂蝶)을 끌어당깁니다. 그러나 독충은 몰아 냅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의 설교의 내용을 보세요. 그의 설교에는 일관성이 있었습니다.
오순절 날 행한 설교에서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설교하였습니다. 그리고 3장에 보면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에게도 같은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오늘 본문에 사두개인 사람들에게도 꼭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해 주었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산헤드린 앞에서도 이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그는 고넬료에게도 꼭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나시되” 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앞에 끌려갔을 때도 그의 증거의 핵심으로 바로 베드로와 같은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사도들이 꼭 같은 설교를 반복했을까요? 그 대답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1~4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위시하여 모든 사도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의 유일하심을, 확고하고 견고하게 감동적으로 증거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4장 12절을 다 같이 읽으십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세상의 다른 종교들은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것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다른 종교들은 우리의 필요들을 깨닫도록 촉구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에서는 죄의 용서함을 받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이상스러운 고행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이는 예수님밖에 안 계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에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관원들은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놀라운 설교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충만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기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충만”이란 말은 “플레로”인데, 이것은 “제어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말하면 동사의 시제가 “계속 성령의 제어함을 받음”인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어디에든지 취해야 하는데, 술취하는 대신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바울은 말씀했습니다. 술에 취하면 술에 이끌려 갑니다. 술이 사람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술이 취해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말할 때 술이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술에 만취한 사람을 보고 ‘만일 저 사람이 제 정신이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늘 성령이 조정하는 능력 아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6장 7절까지와,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3장 23절까지를 읽고 서로 비교해 보면 귀한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믿는 자에게 성령의 충만을 입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골로새 교인들에게는 말씀에 충만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63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그의 말씀이 곧 영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늘 얻고자 하면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큰 기구로 쓰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권세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저희들은 놀라서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그가 본래는 무식하고 단순하고 쉬운 말을 했던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상하게 여겼으며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앉은뱅이가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은 일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의논하여 한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본문 18절에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했습니다.
“절대로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 이제부터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말라”고 사도들에게 엄히 명령했습니다.
그것으로 다 해결된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요? 사도들은 이미 다른 명령을 받은 몸이었으므로 그들은 누구에게 순종할 것인지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4장 19~20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했습니다.
성령 충만하기 이전과 성령 충만한 이후가 얼마나 달라졌나를 보세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하게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데 두려워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우리 한국에서 미국에 이민 가신 분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당하기 마련이지만, 그 중에 가장 불편한 것이 언어입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매우 당황해 합니다. 그래서 눈치만 보며 살고, 어딘지 모르게 좀 멍한 것 같은 인상을 받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신앙을 가지고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으면 안되는 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권사님은 켄터키 치킨집에 들어가서 닭다리를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으니까 다리를 툭툭 치고 손가락으로 두 개를 가리키니까 파는 사람이 웃으면서 닭다리를 두 개 주더랍니다. 늘 닭다리만 먹으니까 가슴살이 먹고 싶어서 가슴을 치면서 두 개 달라고 손가락으로 표시하니까 우유를 두 개 주더랍니다. 그러면서도 아무 주저함 없이 살아 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믿는 사람은 어디 가나 가슴을 펴고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을 믿습니까?
본문 4장 24~30절은 사도의 기도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당면한 무서운 핍박을 시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까지도 하나님의 권위와 권능 아래 속해 있습니다. 저희의 결정은 사실은 저희 자신이 하는 것 같았으나 하나님께서 결정하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바로 왕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해졌었습니까? 그것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야 이스라엘 민족이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언제나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주관하시지 않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 사실은 그때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의 연자 맷돌은 너무 천천히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때는 돌아가는 것 같지 않게 보이기도 하지만 매우 보드랍게 갑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믿음은 이와 같이 위험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속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하지 아니하시며, 실패하실 수도 없습니다.
여기 보세요. 사도들이 자기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주관해 주실 것을 기도 드린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도를 마치자마자 하나님의 응답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31절을 보세요.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그런데 사도들이 비난받고 조롱당하며 위협을 받고 핍박을 받고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 기도했어요? 원수 갚아 달라고 기도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물리쳐 달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성전 문 앞에 앉은뱅이를 고쳐 주신 것처럼 저희의 심령을 고쳐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도들은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으로 불 타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주님의 몸인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32절에 보니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믿는 무리”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교회 성장 모습을 보면 아주 흥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5절에 보면 처음에 120명의 성도가 모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에 보면 3천여 명 이상이 늘어났습니다. 그 다음 사도행전 4장 4절에 보면 또 다시 5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충성심의 보답으로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도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전 3:8)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하는 만큼 응답하십니다.
여기 하나님의 종들은 한 번도 곁길로 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유일하면서도 최고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 충성했습니다. 본문 33절에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업을 한다고 하면서도 행정적, 사무적인 일에 쫓기기가 쉽습니다. 물론 이것도 필요한 것이지만, 복음 전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여기서 우리는 귀한 교훈 두 가지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단합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단합된 증인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마음과 뜻과 생각과 정신이 모두 하나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마귀의 하는 일은 이간붙이고 갈라놓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하는 일은 하나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4장 3절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고, 빌립보서 4장 2절에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둘째는 희생입니다.
그들은 주의 복음을 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바쳤습니다. 자신의 삶과 돈과 시간과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주님이 그 길을 보여 주셨고 제자들은 그 길을 따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역사를 보세요. 이 두 사람은 성격적으로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이고, 직선적이고, 결단력 있는 행동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주관 아래 충돌없이 같이 일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단합하고 사람들이 단합했습니다. 그들의 팀웍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박조준목사] 담대하게 전하라 < 박조준목사 설교 < 기사본문 - 뉴스포유 (newsforyou.kr)
'박조준목사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조준목사] 훌륭한 하나님의 종 - 뉴스포유 (0) | 2021.09.27 |
---|---|
[박조준목사] 복음을 증거하라 - 뉴스포유 (0) | 2021.09.27 |
[박조준목사] 일어나서 걸으라 - 뉴스포유 (0) | 2021.09.05 |
[박조준목사] 성령의 놀라운 역사 - 뉴스포유 (0) | 2021.08.29 |
[박조준목사] 그리스도인의 사명 - 뉴스포유 (0) | 2021.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