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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목사 설교

[박조준목사] 마지막 날이 옵니다 - 뉴스포유

디모데후서 3 : 1 - 17

 

오늘 저녁 읽은 말씀은 마지막 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할 것이다”

첫째로, 마지막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마지막날은 다른 날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때가 어떤 의미에서는 마지막 날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마지막날은 어려운 때라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Chalepor 라는 말의 뜻은 ‘어렵다’, ‘힘들다’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정신적 혹은 육신적 고통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때를 ‘위험의 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주 성난 바다나 사나운 짐승을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마지막날에 주님의 교회는 이렇게 어렵고, 힘들고, 위험한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될 것을 말씀하여 줍니다.

왜요?

셋째로, 오늘 주신 말씀 2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악한 때 이 어려운 때는 악한 사람들이 활동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너는 이것을 알아두라’고 합니다. 너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서 오는 때를 위하여 준비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마지막날의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1. 마지막날 사람들의 도덕적인 행위는 어떻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2-4절 말씀을 보세요.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을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 마지막때 사람들의 도덕적 행위를 열아홉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열아홉가지에 대해서 다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만 그 첫번째과 마지막을 주의해 보세요. “그 때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4절 마지막에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행위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 열아홉가지 표현을 한 줄에 꿰면 사랑으로 묶을 수 있는데 사랑은 사랑인데 사랑의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쾌락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냈습니다. 특별히 중간 부분을 보세요. 이것은 젊은이들이 그 부모에 대한 자세입니다. 보세요. 모두가 부정적입니다. 여기 다섯가지를 기록했는데요

① 부모에게 순종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를 학대하는 패륜적인 행위가 우리 주변에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까? 가슴 아픈 일입니다.

② 감사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외부적인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과 조건이 전에 비하면 얼마나 좋아지고 편해졌습니까? 생활이 전에 비하면 얼마나 윤택해 졌습니까? 그런데 전보다 감사가 더 많아졌습니까?

③ 경건하지 않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을지 몰라도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십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하십니다. 그러나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지 않습니다. 경건 생활하려면 절제 생활해야 하는데 절제하지 아니하고 육신이 하자는대로 합니다.

④ 무정합니다. 정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었던지 나만 편하면 된다는 자세입니다. 정이 없는 사회, 살아가는 맛이 없어지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영어 번역에 보면 They are inhuman ‘그들은 비인간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비인간이 무엇입니까? 도덕이 없는 사회가 비인간의 사회입니다. 도덕은 양심에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인간이 인간이 되려면 도덕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비인간화되어 가는 세상에서는 도덕이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사회는 비인간 사회입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사회는 비인간 사회입니다. 무정한 사회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젊은이가 자리에 앉아 있고 나이든 사람이 서 있을 때 보통 젊은이는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왜요? 눈을 뜨면 똑바로 뜨고 앉아 있습니다. 눈을 감을 땐 그래도 양심이란 말을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양심이 없어져 갑니다. 무정한 세상입니다.

⑤ 원한을 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원한을 풀지 않아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건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분한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을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분을 풀지 아니해서 일어나는 끔찍스러운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너무 많이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세상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마지막 날, 어려운 때의 표시입니다. 마지막 때의 특색이 무엇입니까?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의 생활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은 이웃이고 그리고 나중이 우리 자신인데 그 순서를 뒤집어 놓아서 우리 자신을 먼저 놓고 하나님은 나중에 놓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의 근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우주적인 심각한 문제의 해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복음의 약속대로 새로 나는 것 새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만 위하던 자리에서 타인을 위하는 자리로, 안으로 굽기만 하던 팔을 밖으로 활짝 펴는데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삶 전체를 새롭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의 자리에서 하나님 중심의 자리로 이끌러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날의 문제는 도덕의 표준이 자기 중심인데 있습니다.

2. 마지막날 사람들의 종교 생활은 어떻습니까?

영어 개혁 표준 성경에 의하면 “종교의 형식은 가지고 있으나 그 능력은 부인한다”고 했습니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종교와 도덕 사이에는 결혼한 것보다는 이혼한 적이 많았습니다. 주전 7세기나 8세기 경에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선지자들의 경고를 통해서 종교와 도덕이 이혼한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 때만 하더라도 종교적인 기운이 일어난 같은 때 불의가 또한 성했습니다.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들어보세요.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재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며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들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불의와 부도덕 속에서 사는 그 당시 종교적인 사람 바리새인들에게 같은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도 비슷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겉으로 볼 때는 종교인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그 내용을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어떻습니까? 주일이면 깨끗한 옷을 입고 예배당에 나옵니다. 서양에서는 소위 Sanday-Best라고 해서 예배당에 나갈때는 정장을 하고 제일 좋게 입고 나갑니다. 찬송을 부릅니다. 기도를 드리고 함께 아멘 합니다. 헌금 주머니에 헌금을 드립니다. 교회의 직분도 맡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능력 없는 형식 속에 소위 Reality가 없는 겉모양, 진실성이 없는 경건, 도덕이 없는 종교, 실천이 없는 믿음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미워하십니다. 실속 없는 걸 모양만의 신앙생활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참 종교는 형식과 능력의 결합입니다.

형식 없는 능력도 아니고 능력 없는 형식도 아닙니다. 형식도 소중하고 능력도 필요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는 형식이 필요합니다. 가령 교회는 하나의 형식입니다. 교회 아니고도 엄격히 말하면 우리가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곧 구원은 아닙니다. 그러나 왜 우리가 교회를 소중히 여깁니까? 교회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점점 성숙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는 소위 무교회주의 자들이 있지요.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나 그저 예수 믿으면 되지! 옳은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면 누구를 통해서 예수를 믿습니까? 교회를 통해서 예수를 믿는 계기를 만들고 교회의 신앙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그 자체가 구원은 아닙니다. 교회가 제도나 형식, 법이나 규칙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나 이것을 성경의 역사보다 앞세울 때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는 법과 규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 단체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그 규칙이나 법이 곧 교회는 아닙니다. 법이나 규칙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법을 위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옛날 예수님 당시만 해도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법이나 규칙의 정신이 무엇이냐, 생각하기 전에 법의 문자를 지키려고 힘썼고 그대로 하질 아니할 때 법을 어긴 사람으로 정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정죄하기까지 된 것입니다.

가령 안식일의 규례만 하더라도 여러가지가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행이 밀밭 사이로 지나면서 배가 고프니까 밀이삭을 비벼 먹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얼른 예수님을 찾아와서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습니다.”고 하면서 고발했습니다. 왜요? 밀이삭을 잘라 비빈 것은 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답변하셨어요? “옛날 다윗도 배가 고플 때 성전의 진설병은 하나님께 드리기로 되어 있고 사람이 먹는 것이 아닌데 배가 고프니까 진설병을 먹은거야. 안식일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사람이 법을 안지켜도 됩니까? 아닙니다. 법과 질서를 지켜야만 합니다. 그러나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위해 법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위한 법이고 신앙을 위한 규칙이지 법이나 규칙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므로 법 자체도 중요하지만 왜 이런 법을 만들었을까 하는 그 법의 정신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3. 마지막날 사람들의 지성적 생각은 어떠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7-8절을 보세요.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했습니다.

6절에는 이렇게 말했어요.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려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때 사람들의 방법은 직접적이거나 공개적이 아니라 은밀하게, 비밀히, 슬쩍합니다. 그들은 살금살금 들어옵니다. 앞문을 사용해서 버젓이 하는 것이 아니라 뒷문을 사용하여 몰래 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가정 특히 부인들에게 집중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남자보다 여자를 먼저 꾀이고 그 여자를 통해서 남자를 꾀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경우도 그랬잖습니까? 대단히 미안한 말씀이지만 여자는 남자보다 호기심이 더 많습니다. 신앙 생활하는데 있어서도 여자들이 열심이 있고 적극적인 면이 있는 것이 장점입니다. 반면에 시험에 드는 경우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습니다.

주후 2, 3세기경 Guortie에서는 많은 종교적 상인들이 여행을 하면서 유혹을 했습니다. 오늘도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렇게 합니다. 여자들은 도덕적으로 약할 뿐만 아니라 지성적으로도 약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달콤한 말을 잘 듣고 그러다가 넘어갑니다. 그 약점을 알아서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있는데 특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 8절에 보니까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했다”고 했는데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날 때 바로의 궁정에서 우두머리 마술사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아주 간교하게 모세를 대적하였던 것처럼 사도 바울이 가르친 진리를 대적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는 것을 삼가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성이 부패해지고 믿음에 낙오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어리석음도 얀네와 얌부레의 경우와 같이 모든 사람 앞에 밝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마지막날에 처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말하면서 다시 한번 디모데를 매우 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을 보세요.

“그러나 너 디모데는 다르게 살라”

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같은 의미로 주시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내 교훈과 생활과 계획을 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믿음과 참을성과 사랑과 인내를 본받았습니다.” 14절에 뭐랬어요. “여러분은 배우고 확신하고 있는 진리에 머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의 간절한 심정이 무엇입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을 하고는 좀 다른 데가 있어야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세상이 하는대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세찬 바람은 우리에게 어떤 때는 직접으로 어떤 때는 간접으로 도전해 오고 위협해 옵니다. 달콤한 세속주의의 미풍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다시 다시 한번만 더 한번만 더”하는 유혹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움직이지 말고 산 위에 서 있는 바위처럼 굳게 서 있으라고 하십니다.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편지할 때에도 군대에서 쓰는 용어로, 사령관이 그 휘하 장병들에게 명령하듯이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3절에 “깨어 있으라 믿음에 굳게 서라 한치도 물러서지 말라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했습니다.

자, 이렇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말씀했지만, 복음은 이렇게 분명하게 가르치지만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떠나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합니다. 쾌락을 사랑합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디모데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육신적인 소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상을 쫓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전히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쫓기 위하여 힘썼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도 바울에게 전해진 복음, 이제 바울로부터 디모데에게 복음의 횃불이 전달되는데 그것을 그대로 지키려고 복음 안에 머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디모데의 세상을 따르지 아니했습니다. 인기 있어 보이는 그 무엇을 따르려 하지 아니하고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는 더욱 강조적인 표현을 했습니다. “악한 사람들아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로 하고 속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너 디모데야 너만은 이런데 상관하지 말고 복음 안에 머물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교회를 한마디로 말하면 혁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퍽 발전한 존재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우리는 옛날의 진리를 그대로 붙들고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퍽 전진했습니다. 우리는 새 그리스도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신학이 있습니다. 우리는 새 도덕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개혁을 합니다. 우리는 보다 새로운 무엇을 생산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그러나, 너는 저 악한 사람들, 사기꾼들처럼 되지 말라 너는 듣고 배운바 복음 안에 머물라” “네가 확신한 일에 머물라”고 합니다. 왜요? 바울은 두 가지 이유를 말했습니다.

첫째 이유는 “누구에게서부터 배운 것을 아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누구에게서부터 복음을 받았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사도 바울로부터가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닙니까?

둘째 이유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안 것” 입니다. 디모데는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구약을 배워서 알았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가르침이 사기꾼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나 제가 믿는 복음은 구약의 복음이요 신약의 복음입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확증되었고 주님의 사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복음이 권위가 있습니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생각을 나타냈습니까?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온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입을 통해서 전달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씀에 힘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서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의 권위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간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무엇이 유익합니까?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과학 책이 아닙니다. 철학 책이 아닙니다. 역사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영적인 진리와 도덕을 가르치는데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죄악된 인간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고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다시 사셨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때 구원받을 수 있는 사실을 가르치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구원의 책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려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표준, 우리의 시선이 너무 낮은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우리 삶의 표준을 높은데 두고 우리의 시선을 땅만 보는데서 돌이켜 위엣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는데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데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대가 어떻게 변한다고 하더라도 계속 이 복음 안에 머물러 있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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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읽은 말씀은 마지막 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할 것이다”첫째로, 마지막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마지막날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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