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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목사 설교

[박조준목사] 믿는 이의 사생관 - 뉴스포유

디모데후서 4 : 1 ~ 8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의 우대한 사람 바울이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교회의 목회를 부탁하면서 목회자로써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신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후서를 우리는 목회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은 꼭 목회자에게 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디모데후서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지키라고, 복음 안에서 고난받을 각오를 하라고, 복음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생각하게 되는 디모데후서 4장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여기서는 ‘복음을 전파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엄숙한 명령입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아니해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육감으로 느끼면서 그의 감옥에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고대 전설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 교외 Ortian Way에서 목이 잘리었다고 합니다. 30년동안 잠시도 쉬는 시간 없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여행하며 일하며, 핍박을 받으며, 죽을 고생을 하면서 그의 간증대로 힘에 지나도록 어려움을 겪어서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로 처해 있으면서도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 주변의 사람들이 그의 뜨거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저의 많은 학문이 저를 미치게 하였다”고 말할 정도 였습니다.

진실로 그는 오늘 주신 말씀에서처럼 선한 싸움을 다 싸웠고 그의 달려갈 길을 마쳤고 믿음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의 면류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와같은 신앙의 용장 사도 바울이 교회에 위대한 유산인 복음을 물려주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엄숙히 명령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그의 목회의 후계자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봉사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거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사실 우리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거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기는 마지막 말은 정말 의미심장합니다. 옛글에도 ‘인지장사에 그 언야선’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하는 말은 그 말이 선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게 된 사람이 해도 되고 안해도 상관없는 말을 하지 아니합니다. 농담할 시간 없습니다. 거짓말은 더구나 할 수 없습니다. 꼭 필요한 말 안해서는 안되는 말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어느 편지를 보아도 다 은혜가 됩니다만 특별히 디모데후서 4장을 읽을 때 우리는 읽기만 해도 깊이 우리의 심금을 울려 줍니다. 이 세상은 불의의 사고가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사람들이 죽고, 여객선이 침몰해서 사람들이 죽고, 기차가 탈선해서 사람들이 죽고, 자동차의 사고로 사람들이 죽고, 가스의 폭발로 사람들이 죽고, 백화점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겨 심장이 마비되어 뇌일절이 생겨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매일 매일을 나의 마지막 날로 알고 사는 생활밖에 더 지혜로운 생활이 없는 줄 압니다. 성경에도 야고보 4장에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 어떤 사람이 아무 도시에 가서 1년을 유하며 장사를 해서 이를 보리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들으라. 너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각종 사고로 인해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한시간 후에 있을 일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번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누가 그런 사고를 당한 것이라고 예측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저녁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실 우리가 다 한번은 이런 때를 당합니다. 오늘 저녁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 전하는 것이 마지막이 안된다고 누가 보장할 수 없습니다. 또 제가 전하는 말씀을 들으시는 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살아야 합니다. 의미있게 살아야 합니다. 보람되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장 6절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여러가지 환경이나 형편으로 보아 오래지 않아 순교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예감하면서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말씀을 여기서 했습니다. “관계와 같이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사생관을 말씀해 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죽음이 점점 다가올 때 이 죽음이란 엄숙한 사실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여기서 말씀하시기를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관제로 보았습니다. 그 뜻은 옛날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다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물 가운데 액체를 드릴 때는 그런 제사를 전제 혹은 관제라고 불렀습니다. 제단에 부어 드리니까 관제라는 이름으로 드렸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장차 당할 순교의 죽음을 하나님의 제단에 최후로 부어 드리는 제사로 보았습니다. 물론 그의 일상생활이 하나님께 드리는 말하자면 산 제사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다음부터는 그에게 있는 모든 것, 그의 재능, 그의 지식, 그의 시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제는 그의 생명, 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제단에 붓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죽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최후의 제사로 보았습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라”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만한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문자 그대로 자기 생활에 있어서 모든 것을 산 제사로 드렸습니다. 마지막 죽음까지 하나님께 최후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뿐만 아니고 참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생활은 다 이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매일 매일의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께 향내나는 제사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죽음을 순교는 말할 것도 없고 보통 죽음이라 할지라도 죽은 자체가 최후의 생명을 하나님께 부어 바친 제사인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모든 성도의 견해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죽음을 떠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흔히 누가 죽었다고 하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사상과도 비슷한 것입니다.

죽음을 하나의 떠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떠난다고 하는 말의 본래 헬라말 ‘아나루시스’라는 말의 깊은 뜻을 생각해 보면 사도 바울이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깊은 죽음에 대한 의의를 생각하면서 이 말을 쓴 것이 분명합니다.

가령 ‘떠난다’고 하는 원어의 뜻 가운데 하나는 ‘멍에를 벗긴다’는 뜻이 있습니다. 소나 말이 수레를 메고 먼길을 가다가 그 일을 다 마친 다음에는 멍에를 벗어 놓습니다. 혹은 소가 밭을 갈다가 그 밭을 다 간 다음에는 소의 목에서 쟁기의 멍에를 벗어 놓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사명을 받은 후네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목에 메운 멍에를 메고 일생을 산것이었습니다.

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멍에를 벗어 놓게 되었습니다. 멍에를 벗어 놓고 쉬게 되었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수고를 벗어 놓고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성도의 죽음이 다 이런 것입니다.

세상에 있을 때 우리가 다 무거운 멍에를 메고 삽니다. 우리가 그 의무를 마친 다음에는 그 멍에를 벗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여기 ‘떠난다’고 하는 의미 가운데는 ‘고랑을 줄여 놓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죄수에게 고랑을 채우지 않습니까. ‘떠난다’는 말 가운데는 채웠던 고랑을 풀어놓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뜻을 생각하면서 말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그때에 고랑은 아니지만 쇠사슬을 한 손에 채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떠난다’고 하는 말은 지금 내 손목에 매여 있는 쇠사슬을 풀어놓고 하나님 나라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하는 뜻이 이 가운데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바울은 로마 감옥을 벗어나서 하늘 나라에서 해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다 감옥에 있지는 않지만 깊은 의미에서 생각할 때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어떤 고랑에 채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제약을 받습니다. 육신의 제약을 받고 삽니다. 이 세상에 살 때는 환경의 제약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의 제약을 받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모든 제약을 벗어 놓고 하늘 나라의 해방과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는 근심과 걱정에 매여서 살지만 우리가 최후로 내 임무를 마치고 하늘 나라에 갈 때에는 그 모든 고난을 벗어 놓고 하나님 나라에 가서 자유와 행복과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면 다른 뜻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떠난다’는 말은 ‘장막의 줄을 풀어놓는다’하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지날 때 장막 속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곳에 가서 얼마큼 살다가 장막을 옮기려 할 때는 그 장막줄을 풀어야 했습니다. 장막줄을 풀어서 장막을 거둬 자기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곤 했습니다. 거기서 얼마큼 살다가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는 장막줄을 풀어서 장막을 거둬 이전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광야를 다 지나가서 가나안 땅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는 장막 속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는 집에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여행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장막줄을 푼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이 장막줄을 마지막으로 푸는구나 생각하고 이 장막 줄을 최후로 풀고 이제는 더이상 장막 속에 살지 아니하고 내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그 영원한 집에 갈 때가 가까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에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다 이 세상에서 한 나그네로 이 장막 집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다 산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장막줄을 풀어서 거두어 가지고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온전한 집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뜻이 더 있습니다. 여기서 ‘떠난다’하는 뜻은 ‘배의 닻줄을 푼다’는 뜻이 있습니다.

배가 항구에 들어가면 닻줄을 먼저 내립니다 그리고 항구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닻을 그대로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을 다 보고 배가 그 항구를 떠나려 할 때에는 닻줄을 거둡니다. 그리고 넓은 바다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실 바다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거든요. 바다의 위험도 다 당해 본 사람 아닙니까. 배를 타고 여러 곳에 다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한국에 들렀다가는 닻줄을 거둬 가지고 떠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 멸망의 성 항구에서 아예 닻줄을 거둬 가지고 하늘 나라의 영생할 곳으로 떠나 갈 기약이 가까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간이란 긴 세월을 헤매이다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온전히 들어가게 된 것처럼 나는 닻줄을 거두어서 요단강을 건너갈 기약이 가까왔다. 가나안 땅에 가서 영원한 축복을 받을 때가 가까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죽음에 대한 견해입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에 대한 견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는 죽음을 어떻게 보고 살아왔는지 모르지만 이제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최후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세상 멍에를 벗어 놓고 하늘 날에 가서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것입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장막줄을 풀어 가지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계신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닻줄을 거둬 가지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온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근본 생명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오직 환경만 변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영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죽음에 대한 깊은 뜻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사람이 산다는 것은 어떻게 보았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삶을 어떻게 보았는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그러니까 사람이 사는 것을 싸움으로 보았습니다.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사람의 사는 것을 경주로 보았습니다. “나의 믿음을 지켰으니” 사람의 사는 것을 청지기의 생활로 보았습니다.

여기 선한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전쟁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운동선수가 시합을 할 때 싸우는 싸움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번역에 보면 ‘씨름’이란 말로 한데도 있습니다. 한국 씨름처럼 얼른 판단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 말하면 레슬링입니다. 레슬링처럼 오래 하는 것입니다. 그 레슬링을 생각하면서 이 말을 쓴 것이 분명합니다.

운동선수는 언제든지 규칙대로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직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온 정력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스포츠맨의 정신입니다. 선한 싸움이라고 하는 말로 참된 스포츠맨의 정신을 가지고 싸우는 싸움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생의 길을 바로 가려고 하면 두 가지 싸움을 끊임없이 해야만 합니다. 그 하나는 내 안에서 이 육신을 근거로 하여 일어나는 모드 욕심, 혈기, 정욕, 게으름 같은 모든 악의 세력에 항거해서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유혹과 악의 세력에 항거해서 끊임없이 싸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생을 이런 싸움으로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싸움을 싸우고 계십니까? 이 싸움에 패한 분은 안계십니까? 다시 일어나서 선한 싸움에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승리의 비결은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달려 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운동경기 가운데 특별히 경주를 생각하고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주 가운데 제일 유명한 경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라톤 경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서 마라톤 경주가 시작되었는지 아시지요. 옛날 동방의 강국 파사가 일어나서 근동일대와 유럽의 나라들까지 점령할 때 근동일대를 모두 점령하고는 말머리를 서편으로 돌려 헬라를 정복하려고 100만 대군이 쳐들어갔습니다. 그때에 헬라의 여러 작은 나라들은 협력해서 말하자면 연합문을 조직해 가지고 이 망한 군대 파사와 싸우기 시작해서 진군을 했습니다. 마라톤이라는 작은 촌에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는 그 당시 역사로 보면 역사적 의미가 있는 전투였습니다. 만일에 그때 헬라가 패전했다고 하면 역사에 나타난 헬라 문화의 꽃이 필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 헬라의 군인들은 전력을 다해서 최후까지 싸웠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때 사령관은 너무 기뻐서 자기 부하 하나를 택해서 얼른 이 소식을 아덴에 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사령관의 명령을 받은 군인은 이 소식을 가지고 기뻐서 밤이 맞도록 뛰고 또 뛰어서 아덴에 와서 성문을 들어서면서 여러 시민에게 외친 말이 “기뻐하세요.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외쳤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그 군인은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마라톤 경주의 내력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라고 한 말에는 그의 사명의 의미도 생각하면서 말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 경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명을 다해서 끝까지 전 코스를 마치겠다고 하는 결심은 비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세상에 보내시고 특별히 우리는 택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하실 일이 꼭 있어서 입니다. 그 일을 다 마치는 것이 마라톤 경기장에서 전 코스를 마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달려갈 길을 다 마쳐야 합니다.

끝으로,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것을 청지기로 생각해서 한말입니다. 청지기의 직분은 자기가 맡은 일을 잘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는 날부터 귀한 보배 다시 말하면 믿음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애썼습니다.

여러분은 받은 믿음을 잘 지키십니까? 믿음을 도둑질하는 절도, 강제로 빼앗는 강도도 많습니다.

바울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을 끝까지 풍성하게 지키는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영적인 경주에서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시들지 않고 피하지 않는 면류관, 상급을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나타내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꼭 같은 면류관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다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그러면 선한 싸움을 싸우세요.

낙심 마시고, 달려갈 길을 마치세요. 중도에 쓰러지거나 기원하지 마세요. 끝까지 믿음 지키세요. 그래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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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의 우대한 사람 바울이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교회의 목회를 부탁하면서 목회자로써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신 것을 생각했습니다.그래서 디모데전후서를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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