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1 : 8 ~ 18
우리가 디모데후서를 읽어 내려가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이제 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얼마남지 않은 것을 스스로 내다보면서 젊은 디모데, 말하자면 믿음의 아들에게 복음을 맡기는 것입니다. 청년 디모데의 책임이 얼마나 중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디모데로 말하면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의 거짓 없는 믿음을 이어받은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더구나 일찍이 주님의 위대한 종 사도 바울을 알게 되고 그로부터 신앙적인 영향을 깊이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간절한 기도에서 언제나 디모데를 생각하였고 아들과 같이 사랑하였습니다. 이제 청년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손에서 복음의 횃불을 이어 받아 후대에 계속 날라야만 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말하면 디모데가 지도자로서의 약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의 나이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퍽 젊은 사람이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청년이었습니다. 청년의 몸으로 지도자가 된다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더구나 디모데는 몸이 약했었습니다. 병이 자주 났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 보면 “이제 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말할만큼 디모데의 건강을 바울이 염려할 정도 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시간에는 말씀드린 대로 디모데는 그 성격이 퍽 수줍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가지 어려운 과업이 맡겨질 때 성격적으로 주저하곤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0절에도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고 당부한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젊고, 약하고, 수줍은 디모데를 불러 하나님의 복음을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어리석은 자를 들어서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능력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강하다고 자부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쓰시지 않으시고 ‘나는 약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고 고백할때 그를 들어 쓰신 것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를 보세요. 그가 애굽왕 바로의 궁중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자라면서 귀족 대접받고 귀족들과 함께 교제하며 학문을 습득하고 정치 외교 기술을 익히고 나이로 보아도 40이 났으니 이제는 일할 만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그의 불타는 애국심과 민족혼은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인간적인 자신감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의 힘을 의지하다가 살인죄만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애굽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없어 멀리 미디안으로 도망하게 되었고, 외로운 가운데서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게 되고 결혼해서 자녀 낳고 그저 평범한 목동으로 그날그날 지내고 있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40년이란 세월이 지나 모세의 나이 80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자기 스스로를 보면서 하나님이 맡기시는 사명을 사양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이는 80 늙은 몸입니다. 오래 전에 뜻을 가지고 일해 보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나서 봐야 누구하나 나를 인정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 저는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솔직히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라, 모세야, 내가 너와 함께 하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세우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했습니다. 디모데에게도 이 귀한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어리고 약하고 수줍지만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할 일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복음이 부끄럽습니까? 오늘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되지 아니할 때 몰랐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상하게 보고 말하는 심지어 놀려주는 일까지 있었고 핍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나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교에 가서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으려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면 기도하기 위해 눈감고 있는 틈을 타서 점심밥, 도시락을 숨겨 놓는 애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애는 아예 기도 드리지 않고 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 믿는다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더구나 믿지 않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믿는 사람이 미련하게 보일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꼭 같은 복음, 꼭 같은 십자가의 도이지만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과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각각 다르게 보입니다.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은 복음이 미련하게 보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들립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옛날 로마에서 노예가 아니면 식민지 백성들을 극형에 처할 때 쓴 형구였습니다. 가장 천하고 가장 더럽고 가장 무서운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이 부끄러운 십자가에 주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와같이 천한 사람들만 못 박히는 이런데 처형받은 사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 미련하게 들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옛날 헬라 사람들에게는 이 복음이 미련하게 들렸고 복음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부끄러울 수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복음, 이 십자가의 도가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너무 단순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는데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너무 단순한 교리입니다. 거기에 무슨 철학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말합니다. “기독교는 깊은 맛이 없어. 차라리 불교는 깊은 맛이 있는데 그리고 옛날 노자가 가르친 도덕경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깊은 맛이 있지 기독교야 깊은 맛이 있어야지. 그저 애들과 부인들이 믿기에 좋지. 나 같이 공부한 사람이 어떻게 믿어?”
공부한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되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부끄럽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옛날 철학을 많이 숭상하던 헬라 사람들에게는 사실 기독의 복음이 미련하게 들렸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니 내가 선을 행하고 내가 덕을 쌓고 그야말로 도가 높고 덕이 부하여 내가 구원을 얻는 것이지 무슨 진리를 믿어서 누구를 믿어서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그것은 덕이 없는 사람들 그 천한 사람들이나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이야 덕을 행했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겠지 이렇게 말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비웃고 믿는 사람을 미련하게 봅니다.
더구나 대속한다는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들립니다. 누구든지 정직한 사람이나 정정당당한 사람이야 자기의 책임을 자기가 지는 것이지 남의 덕에 구원을 얻겠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서 자기는 자기 덕으로 구원을 얻겠다고 합니다. 물론 인류의 깊은 연대성과 자기의 성품이 얼마나 죄악으로 말미암아 부패하였다고 하는 보다 깊은 사실을 보지 못해서 그럽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멸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여러분 자세히 들으세요. 누구든지 십자가의 도, 이 복음이 미련하게 보이면 그것은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가 그만큼 중태에 빠졌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십자가의 도 기독교의 복음이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미련하게, 어리석게 보입니다. 옛날부터 오늘까지 많은 철학을 연구한 사람들 많은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은 십자가의 돈, 기독교의 복음을 미련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대낮에 해를 쳐다보면서 어떻게 해가 이렇게 어두우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단순히 그 눈에 이상이 있는 것 뿐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미련하게 보인다고 하면 그만큼 그 사람의 심령이 부패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지혜도 됩니다. 그렇지만 지혜라고 하는 것보다 더 구원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기독교의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게 하는 능력은 십자가의 복음 밖에는 다른데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더러운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불의한 마음을 의롭게하고 부정직한 마음을 정직하게 하는 다시 말하면 사람의 마음을 변화하게 하는 능력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 밖에는 다른데서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빠지고 죄악에 얽매여서 죄의 종이 되었던 사람에게 그로 하여금 죄의 사슬을 끊고 해방을 받아서 자유로운 사람을 만드는 능력은 십자가의 복음 밖에는 다른데 없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과 기쁨과 화평을 주는 것도 십자가의 복음에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복음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더러 “너는 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이 말씀이 디모데후서 1장의 주요한 교훈입니다. 12절에 보세요.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했습니다. 8절에 뭐랬어요? “그러므로 내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16절에는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 가지 권면을 했습니다. 8-10절에 주의 증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디모데는 천성적으로 소심해서 부끄러워하기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주를 증거하고 고난을 감내해야하는 환경을 피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번 디모데에게 격려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받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육체의 고통스런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충성스런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부분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신앙 때문에 순교하는 자리에 까지 갔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때 전부터’ 결정하신 그 분의 위대하고 영원한 계획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작부터 끝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들은 향한 뜻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분입니다.
이 구절에서의 강조점은 ‘은혜’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가 스스로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디도서 3장 5절에도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행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의 뜻이 고난을 내포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들리 수 있어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가장 좋은 것임을 믿습니다. 이것은 숙명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담긴 그 계획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 모든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돈으로 살 수 있었던 것도 아니요 노력해서 얻은 것도 아니요 전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을 물리치셨습니다.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난과 죽음입니다. 바울 자신이 이 편지를 쓸 때 사실 죽음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최후의 적인 죽음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사망을 폐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갈파했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멸하셨을 뿐 아니라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은 드러내셨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과 부활에 대한 확신과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여기 “썩지 아니함을 드러냈다”고 했는데 이것은 부활한 육체에 대해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이 몸은 썩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영광스러운 몸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몸이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누리게 될 천국은 “썩지 아니하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것”을 유산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때문에 갇힌 것을 부끄러워 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었지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에베소 사람들은 어려운 시기에 바울을 저버렸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서 증언하기 위해 로마에 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혀 있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디모데도 군중들과 함께 타협을 했다면 그가 에베소에서의 사역이 더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에게 타협하지 말고 진실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는 디모데가 죄수인 바울과의 교제를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서 개인적으로 사역을 맡기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반포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반포자는 왕의 전령이었고, 그 메시지는 존중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도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명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자격을 갖추고 주님께 혹은 성령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선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의 교사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지역 교회를 담당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 이방인이란 말이 바로 바울을 로마에서 처음으로 감옥에 가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아시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에 대해서 특별히 감사해야만 할 것입니다. 아시아에 복음을 가져오신 분이 바로 바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사하기보다 바울을 부끄러워했고 그와 관계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확신했습니다.
12절에 보세요.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신실하시며 자기를 지켜주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구원은 어떤 교리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비로 그 교리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비로 그 교리가 중요하다 할지라도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그분을 믿어. 나는 그분을 알아”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어려운 때 우리가 주님께 올바로 서 있고 그분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으며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해도 우리가 위를 위하여 하나님의 종들의 편에 서는 일도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은 그들의 시련의 시간에 견고하게 서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이 세상 사람들과 타협했다면 좀더 평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굳게 서 있었습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디모데로 하여금 바울 자신이 본을 좇으라고 격려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진리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복음을 맡겼습니다. 이제 그 고귀한 그리스도인의 진리를 굳게 지키며 다른 사람에게 전할 엄숙한 책임이 디모데에게 지워질 것입니다.
여기 13절에 ‘본받아 지키고’라는 말이 나오지요. ‘본’이란 ‘틀 혹은 건축가의 설계도’를 의미합니다. 기준을 말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가르친 것을 본받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통성이 믿음과 사랑에 의해서 다져져야 합니다. 믿음을 지키려는 욕망으로 다툼을 일삼고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진리를 맡기신 것은 성령이시며 따라서 성령께서 그가 진리를 지키도록 도우셨을 것입니다.
성령은 반드시 우리를 가르치시고 진리를 지킬 수 있게 하시며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게 하십니다.
인류역사의 시작부터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은 공격을 받아 왔고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 의해서도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왜요? 바울과 디모데와 같은 헌신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새로운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충성스럽게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동안 암울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데마는 그를 버리고 갔고, 다른 동료들도 먼 사역지로 보내졌습니다. 거짓 교리가 교회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하기를 갈망했으나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디모데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에베소를 떠나 바울을 돕고자 로마에 왔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네시보로였습니다. 그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음에도 굽히지 아니하고 바울을 찾아왔고 목숨을 걸고 그를 옹호하고 그를 도왔습니다. 모든 사역자는 주님의 일에 그를 돕는 충성스러운 교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저가 나를 자유케하고’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신선한 공기처럼 나를 힘이 솟게 한다’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때 ‘한 줄기 신선한 공기’와 같은 성도들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바울의 편지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오네시보로가 어떻게 바울과 교회를 섬겼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셨으며 그날에 오네시보로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성공적인 사역의 요소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담대한 열정과 부끄럽지 않은 고난 그리고 영적인 충성입니다.
우리 모두 복음을 부끄러워 말고 담대히 전하고 복음을 위해 봉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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