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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육소식

[강성률목사] 엘리야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있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11-12).

 

이 내용은 엘리야가 그를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쳤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이시고 듣게 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나시기 전에 산을 가르는 크고 강한 바람에도, 지진에도, 불 가운데서도 계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엘리야에게 보이셨을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뜻 없는 일이 없습니다. 분명히 엘리야나 후대에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하시기 위함입니다. 산을 가르는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 이러한 표적들에도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이러한 표적 등은 하나님의 웅장함, 엄위, 권능 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적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외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그동안 하신 일은 이러한 외적인 표적과 기사 등이었습니다.

 

3년 6개월 가뭄 기간 중에 한 번도 훈련해보지 않은 까마귀가 그에게 떡과 고기를 가져다 준 일, 통에 가루가 한 움큼밖에 남지 않았고 병에 기름이 조금 밖에 남지 않았었지만 남은 가뭄 기간 동안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와 그의 아들이 먹을 수 있도록 통의 가루와 병에 기름이 다하지 않은 일, 이스라엘 왕과 왕후, 신하들이 지지하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홀로 상대하여 죽인 일 등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나타내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과 같은 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맛 본 엘리야는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그런 기적들을 나타내 주시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큰 이적들을 통하여 엘리야에게 자신을 알리는 차원을 지나, 이제는 인격체이신 하나님 자신을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의 수준이 표적이나 기사 등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려고만 한다면, 종교성은 그에게 있을지 모르지만 인격적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께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며 교제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신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엘리야 이전에 이미 이러한 신앙적인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에녹은 무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1-24). 에녹은 육신의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오른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특별한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세속을 떠나거나 특별한 고행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처럼 자녀를 낳고 길렀으며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가 달랐다면 보통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점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하였기 때문입니다(암3:3). 자신의 뜻보다 길이요 진리이신 하나님의 뜻을 더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 또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16:7-8). 다윗은 밤마다 그의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고, 무슨 일을 할 때 항상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가 흔들릴 때는 하나님의 현존을 감각하며 위로를 받았고 힘을 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시16:9).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그 자신이 항상 기뻤으며 육체까지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나타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고 믿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보지 못하고 믿는 것입니다(요20:29).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은 양심을 통하여 성령께서 하시는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 음성이야말로 지각을 사용해야 들을 수 있는 장성한 자의 몫입니다(히5:13-14).

강성률 목사(신촌예배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