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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목사 설교

[박조준목사] 다른 교훈을 조심하라 - 뉴스포유

디모데전서 6 : 3 ~ 10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목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인 다른 교훈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단은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들어와서 우리 가운데 잘못된 사상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는데, 식별하기도 어렵고 더 위험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디모데전서를 읽어 내려가면서 이런 이단적인 운동이 초대교회 안에도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단이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이단이란 바르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아주 경건하게 살면서 성경의 교리와 대치되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선전하는 모임이나 사상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마귀는 때때로 보기에 경건하고 훌륭한 삶을 통해서 그들이 주장하는 교리나 논리에 잘못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미혹의 덫을 우리에게 놓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삶이 도덕적이고 깨끗하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들이 주장하는 교리가 무조건 옳다는 전제를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삶에 두기 보다는 어떤 교리적인 주장이나 이론에 두기도 합니다. 교리에 대한 관심이 민감한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삶에 대해서 관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러는 그들의 삶이 아주 잘못되었다 해도 그들이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을 용납하려 합니다.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데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대부분 처음에는 바른 교리를 가르치지만 나중에 가서는 반드시 교리적인 수정을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들의 바른 교리가 그들의 잘못된 삶과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 가서는 그릇되어가는 자기의 양심과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잘못된 교리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단 사상은 결국 끝에 가서는 달라집니다.

이단(異端)이란 한문자를 보면 바로 “끝에 가서 달라지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를 통해서 이단이 주는 교훈을 배웁니다. 하나는 바른 교훈이고 다른 하나는 바른 생활입니다. 이 두 가지는 꼭 같이 중요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과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이 언제나 경계하는 것도 그것이 ‘바른 교리에 근거한 바른 삶인가?’라는 두 가지 측면을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거짓된 종교인을 이야기하면서 이들의 이 두 가지 특성을 똑 같이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릇된 종교인들의 교리적인 왜곡과 윤리적인 왜곡을 지적하므로 그들의 정체를 들어내고 있습니다.

거짓 종교인들의 교리적인 왜곡이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3, 4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 3절에 ‘다른 교훈을 하며’라는 말이 나오지요? ‘다른 교훈’ 그것이 곧 이단입니다. 우리가 이단을 보고 이단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싫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굉장히 흥분합니다. 무당을 무당이라면 싫어하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단’이란 말은 성경의 견해와 다른 견해, 역사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해 왔던 신앙고백과 다른 고백을 의미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면 ‘다른 교훈’과 대조적으로 ‘바른 말’이란 말이 나옵니다.

바른 가르침, 바른 교훈, 그것이 말하자면 정통입니다. 그러나 이 정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른 실천과 바른 삶을 상실해 버릴 때 정통의 의미는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삶의 올바른 내용이 담겨져 있지 않을 때 그 정통은 의미가 없습니다. 정통은 바른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3절 말씀에서는 바른 교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주신 말씀에서 바른 교훈은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바른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한 말씀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 문제는 가장 중요한 핵심 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적인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십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이단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중에 하나를 부인해 왔습니다. 어떤 이단은 예수님의 사람되심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신성만 인정했습니다. 그 당시 영지주의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이단은 예수님의 인성은 인정하지만 그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믿으십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핵심이 성경의 교훈과 다를 때 그 가르침을 이단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주님을 통해서 주신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막연한 하나님의 교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확인되고 전달되고 계시된 교훈들, 그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보여주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대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구주가 되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친히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그 교훈을 여러분의 신앙의 근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믿기는 하는데 내 마음대로 믿으시는 분은 안계십니까?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을 구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오늘 많은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산다고 말합니다만 대부분의 사람이 주관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그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만든 상상의 하나님을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성경이 계시해 주신 하나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고백한 그 신앙고백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상한 것 보았다고 이상한 것 들었다고 현혹되면 안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비취어 그 말씀에 부합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보다 우선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을 보세요.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저 ‘당신은 신앙생활을 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앙이 하나님이 인정할 수 없는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성경 말씀과는 상관이 없는 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진정한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되고 전달 된 그 교훈들을 우리의 신앙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한 것을 보세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신앙의 근거가 되신다면 ‘경건’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거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믿음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설정한 것이라면 경건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경건”이란 말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삶의 태도, 또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경건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술 담배 안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술 담배 안하는 것이 경건 생활의 구체적인 내용 중의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하지 않는 사람 중에 단순히 건강 문제로 술 담배 안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핵심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내 인격이 하나님의 속성을 정말 닮아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삶의 태도 이것이 바로 경건의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믿음과 경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맺어지고 경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내 삶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디도서 1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도 믿음과 경건이란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분을 신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한 삶을 통해서만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하 교훈과 경건에 관한 바른 교훈을 성경을 통해서 이해하십니까? 그리고 바로 이 교훈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의 기초를 삼고 계십니까?

‘바른 교훈’이란 말은 올바른 교훈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건강한 교훈’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병든 교훈’입니다. 사실 어떤 교훈은 우리의 심령과 삶을 병들게 합니다. 이단자들이 가르치는 교리는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우리의 삶을 망쳐 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신랄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사람이야 이 세상에 살다가 다 가는 것인데 기독교는 천국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극락이라고 하는데 표현만 다를 뿐이지 결국은 다 한곳에 갈 것 아닙니까?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옹졸합니까?” 하면서 접근해 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을 망치는 교리를 절대로 관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분명한 길인 생명의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에 관해서 침묵을 지킨다면 그것은 죄인 것입니다.

바른 교훈은 그것이 단순히 틀리지 않았다는데 그 중요성이 있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이단자들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이 바른 교훈을 왜곡시키고 대신에 다른 교훈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경건에 대한 확신을 계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바른 신앙 못지 않게 경건에 대한 교훈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게 되면 사람은 누구나 경건을 향한 삶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들을 때 혹은 성경을 공부할 때 그것이 바른 것인가 잘못된 것인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 설교나 가르침이 나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인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그것이 나의 인격을 하나님을 닮아가게 하도록 만드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어떤 가르침은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 놀라운 통찰력을 제공해 주지만 우리의 인격에 참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에 관한 교훈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하는데 단순히 성경 지식을 위해서라고 하면 잘못된 성경 공부입니다. 성경 공부의 핵심을 경건에 두지 않고 지식에만 두게 되면 그것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사랑과 경건이 없는 지식은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지적으로 교만하게 되면 논쟁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바른 성경 공부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의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자라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말씀을 논쟁거리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앞에 놓고 자신의 삶을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교훈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주신 말씀 4절에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삶을 사는 이단자들의 모습을 폭로하면서 종교의 도구화를 경계합니다. 그는 신앙이나 종교를 삶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관해서 신랄한 경고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5절 말씀입니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했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종교를 하나의 생계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실이 없습니까? 이런 것은 정말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이단의 배후에는 반드시 돈의 세력과 성의 문제가 등장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특별히 돈의 문제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바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면서 이단자들의 부의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성경은 부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돈이 필요 없다고 역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돈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일을 경고 하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세요.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리까지 가게 되면 문제가 됩니다.

7절 말씀을 보실까요.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못하면서도 태어날 때부터 손을 꽉 쥐고 태어납니다. 무엇이든지 잡으려고 덤벼 웁니다. 그러나 70, 80년 후에 가게 될 때는 젓가락 하나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야 깨닫습니다. 서반아 격언대로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이 진리를 일찍 깨달을수록 그만큼 삶은 경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물질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물질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우리가 물질을 필요 이상으로 추구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우리를 온갖 시험과 죄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9절을 보세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언제부터 타락하지 시작했습니까? 왕이 되고 적군들 다 정복하고 여유를 얻게 되니까 타락이 시작된 것입니다. 다윗이 젊은 시절에는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줄기차게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많은 것을 얻고 여유 있는 삶을 즐기기 시작했을 때 그는 비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솔로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어서는 이웃 왕들에게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는 왕이었습니다. 그의 놀라운 지혜를 배우겠다고 선물을 실어 가지고 줄을 이어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이 타락이었습니다.

우리가 많이 쥐고 있다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패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 있고 시간 있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는 풍부하지만 삶의 가치관이 없을 때 결국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필요 이상의 물질의 추구는 우리를 미혹해서 잘못된 삶의 길로 인도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10절을 보세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했습니다.

여기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미혹을 받아 어떻게 된다고 말씀했습니까?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를 하며 교회에 출석하지 않습니다. 사실 다른 말로 하면 “돈을 조금만 더 벌면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하겠습니다.”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돈을 조금 더 잘 벌게 되면 주님 앞에서 점점 더 멀어 갑니다.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 주님과 더 멀어지게 되니 사업이 잘 안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고민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9절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 빠진다는 말은 ‘침몰한다’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가 그런 예입니다. 돈 몇 푼 때문에 인생이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파멸이었습니다. 10절 마지막에는 뭐랬어요?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필요 이상으로 물질을 추구하면 근심이 많아집니다. 돈 벌기 위해서 고심하고 돈 지키기 위해서 근심하는 것입니다. 여기 “찔렀도다”라는 표현을 보세요. 누군가가 부는 아름다운 꽃을 추구하다가 줄기에 붙어 있는 가시에 질리게 됩니다. 그래서 피를 철철 흘리기 시작합니다. 인격이 너덜너덜해집니다. 주님에게서는 멀어집니다. 인간관계에서는 갈등과 오해와 불신을 낳습니다. 차라리 가난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나게 됩니다.

우리 생활 주변에는 부를 추구해 나가다가 심적인 고통을 느끼며 자학하는 삶을 살게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물론 돈 있는 사람이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 부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적은 숫자입니다. 보통 경우에 부를 추구할 수록 그것이 가져다주는 유익보다는 그 가시에 찔릴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을 예외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옛날 청교도들은 필요 이상으로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필요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8절을 보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필요의 기준입니다. 청교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필요 이상으로 주어진 것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책임을 갖게 합니다. 하나는 감사해야 할 책임이고 다른 하나는 나누어야 할 책임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필요 이상으로 주신 것은 주변 사람들을 돌보고 뜻있는 일을 하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책임 의식을 가지고 살았었습니다. 그들은 자손들에게 재산을 물려 주는 것을 최대의 수치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대신 큰 학교를 짓는다든지 장학 사업을 한다든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교회에 기증한 것입니다.

바울이 부의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 중요한 삶의 태도로 강조하고 있는 덕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세요.

“그러나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했습니다. 사람이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거짓말도 하게 되고 흥분하기도 하고 언쟁까지도 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할 수가 없습니다. 경건을 추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삶의 자리는 지족입니다. 이미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면 아우성 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건을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는 “만족은 최대의 재산이다”고 말했습니다. 만족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부요한 사람입니다. 많이 가졌어도 만족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4장 11절에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자족하는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족한 생활을 함으로 믿음에 부요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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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목사] 다른 교훈을 조심하라 - 뉴스포유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목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인 다른 교훈에 대한 것입니다.사실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단은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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