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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목사 설교

[박조준목사] 지도자에 대하여 - 뉴스포유

디모데전서 5 : 17 ~ 25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지도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지도력의 위기를 맞이한 시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지도력의 위기를 두 가지 측면에서 말했습니다. 그 하나는, 민주화 되어 가는 이 사회에서는 신화가 용납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과 같은 이런 공개 사회에서는 지도자의 우상화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옛날처럼 지도자에게 우상화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옛날처럼 지도자에게 접근하기가 어렵고 지도자와 민중과의 거리가 멀었던 시대에는 우상화가 가능할 수 있었지만 지도자의 모든 것이 공개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지도자의 우상화가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옛날처럼 참으로 존경할 수 있는 지도자를 보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나간 시대처럼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분골쇄신하며 인격을 연마하는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지도자를 가운데는 아주 훌륭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능인을 많지만 인격을 갖춘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지도자의 위기는 그들이 탁월한 기능을 갖추었을 분 신뢰와 존경을 받을 만한 인격을 갖춘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지도자에게 기능이 없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도자에게는 지도자로서의 구비해야 할 훌륭한 기능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더 중요한 지도자로서의 인격을 상시하고 있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은 사회가 이처럼 급변하고 있는 만큼 이 사회는 강력한 지도자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말해서 이 사회의 분위기는 지도자를 거부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모순 때문에 현대는 지도자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지도자가 없는, 선장이 없는 배와 같이 표류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지도자를 만들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이 사회의 책임이요 또한 지도자 자신의 책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주신 말씀에서 지도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지도자를 장로라고 명칭으로 불렀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일상적인 지도자를 감독이라 부르기도 했고 장로라고 부르기도 했었습니다. 두 가지 다른 직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람을 두 가지 명칭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초대 교회에서는 두 가지 직분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는 장로 혹은 감독이라 불리는 지도자였고, 다른 하나는 그들을 돕고 있는 집사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생각한 바 있는 디모데전서 3장에서도 두 종류의 직분밖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 1장 1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감독이 아니라 ‘장로’라는 명칭이 나타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이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나이가 어느 정도 드신 분으로 교회에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존경받을 수 있는 분에게 ‘장로’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인격적인 존경의 호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로가 교회의 일을 기능적으로 관여할 때 ‘감독’이라는 기능적인 호칭이 붙여진 것입니다.

감독은 양무리를 감독하고 돌보며 그들에게 신앙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목사의 직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7절에 보면 초대 교회의 지도자의 두 가지 기능을 볼 수 있는데 바로 다스리는 일과,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요샛말로 하면 교회 행정과 말씀 사역입니다. 그러나 모든 지도자들이 다스림과 가르침의 사역을 둘 다 잘 할 수는 없습니다. 사역자들 가운데는 다스림의 영적인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르치는 일에 좀더 많은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마 초대 교회의 어떤 지도자들은 다스리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병행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알고 다스림의 사역이나 가르침의 사역 어느 한 쪽에 더욱 헌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초대 교회에서는 다스림과 가르침의 사역 중에서 어디에 더욱 무게를 두고 있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빛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세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라고 말했습니다. 이 다스림이 없이는 조직체가 바로 유지되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다스림의 사역은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스림의 기능보다 가르침의 기능을 훨씬 더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 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교회가 하나의 조직이므로 조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스림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은 교회 조직체의 생존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영혼의 사활이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다스림보다는 가르침의 사역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가르침의 사역에 종사하는 지도자를 더욱 귀하게 여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전제와 함께 교회라는 공동체가 지도자를 향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그리고 지도자 자신의 지도자적 기능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 공동체는 지도자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지도자를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지도자의 역할을 존중하라고 하십니다.

왜 지도자를 존경해야 합니까? 그가 지도자이기 때문에 그냥 존경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그가 행하는 역할이 소중하기 때문에 존경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17절에 보면 다스림의 역할 때문에 지도자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다스림을 통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가 교회답게 서 나가고 교회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잘 다스리는 지도자를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욱 존경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르침의 사역이 가진 중요한 의미 때문입니다. 목사나 설교자로서의 위치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담당하고 있는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의 영혼이 변화를 받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사람의 심령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말씀의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의 삶에 위대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면 이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사역입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지도자가 행하는 있는 그 역할의 중요성 때문에 더욱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도자에 대해서 말할 때 그 인격에 실망을 느낀 나머지 역할까지 부정하는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지도자의 역할을 부정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을 부정하는 결과가 됩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천사가 아닌 사람을 세워서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면 우리가 지도자의 한 두 가지 인격적인 단점 때문에 그 역할까지 부정하는 것은 바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 주신 말씀 17절에서 하나님이 교회 안에 허락하신 지도자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나 하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교회에 집사직이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사도행전 6장에 집사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사도행전 6장의 사건을 통해서 집사직이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보면 초대 교회 지도자들이 구제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이 다스림의 사역의 한 부분인 구제하는 일에 너무 깊이 관여하다 보니까 그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문제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불평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이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던 사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선택해서 그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말씀 선포와 기도에 전념하자고 말했습니다.

이 예를 보더라도 초대 교회에서의 우선 순위가 어디에 있은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르침의 사역입니다. 지도자들은 교회가 조직체로서 살아 움직여 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 조직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 사역보다 중요시되어서는 안됩니다. 조직의 생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생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 사역과 다스림의 사역을 다 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스림의 사역에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기다 보면 자연히 주님과 더불어 교통하고 말씀 준비하고 묵상하는 시간이 소홀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교회라는 조직체는 잘 유지될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고갈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런 때 초대 교회는 지혜로운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맡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주님 안에서 이 사역을 잘 감당할 터이니 지도자들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우리에게 살아있는 생명의 꿀을 먹여 주세요” 한 것입니다.

가령 우리 교회에서 앞으로 새 예배당을 건축하여야겠는데 이 일을 책임지고 일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 교회 집사님들이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저기 마땅한 부지를 찾으시노라고 애쓰고 이제 그 부지가 마련되면 예배당 건축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드려서 수고하셔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는 위하여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매일 우리 목양회가 모일 때마다 기도합니다. 이 기도가 응답되어서 하나님의 전이 잘 지어지리라 믿습니다.

2. 지도자의 생활을 책임지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절을 보세요.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이것은 구약 신명기 25장 4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종종 이것을 사역자의 생계 문제에 대한 타당한 근거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3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매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했습니다. 14절에 뭐랬어요? “이와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파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다른 것으로 생계를 의지하지 않고 복음 전하는 일에 자기의 모든 시간을 드리는 사람들은 그 사역만으로 생계가 해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에 복음의 사역을 위해서 전적으로 시간을 드리는 사역자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의 생활은 다른 수단이나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음으로 해결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3. 지도자의 명예를 지켜 주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9절에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했습니다.

목사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소문이 떠돌 때 우리는 거기에 동조하겠습니까? 사람들은 남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즐기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 같은 경우에 이렇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지도자에 대한 어떤 고발이나 비난거리가 생기면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지 말라 그 확실한 사건을 목격한 두세 증인이 없을 때에는 장로들에 대한 송사는 아예 고려하지도 말라”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흔들리면 결국 누가 흔들립니까? 그 교회 공동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명예를 지키는 일일 뿐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의 명예를 위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명예를 수호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교회의 명예와 주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지도자에 관한 발설을 조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의 지도자 자신이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22절에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안수가 난발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자질과 상관없이 너무 쉽게 지도자가 되어 버립니다. 교단이 난접하다보니 교단 유지를 위해서 교단마다 신학교를 세우고 지도자를 키워 내는데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해마다 많은 목사가 배출합니다. 좋은 현상 일수도 있지만 아주 무서운 현상 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목사가 되어야 하는데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소명의 문제는 영성의 문제입니다. 그가 영적인 지도자의 자질이 있는가? 말씀 선포할 수 있는 은사가 있는가? 영혼에 대한 애정이 있는가? 영혼에 대한 불타는 관심이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도덕적인 삶에 책임질 수 있는가? 이런 영성의 문제는 그의 학력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6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오니” 여기 자세히 보세요. 안수함으로 은사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은사가 있었기 때문에 안수한 것을 주목하세요. 하나님이 이미 디모데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에게 설교자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설교의 왕자라고 일컫는 Charles H. tpurgeon을 아시지요.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신학교 가는 것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신학교나 사람을 타락시킬 가능성도 있다는 말입니다. Charles H. tpurgeon은 신학교 문고리도 잡아 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공부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압니다. Charles H. tpurgeon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고 책을 많이 읽고 묵상하고 공부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위 신학교라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학문적인 분위기가 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는 설교자로서의 소명이 있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설교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Charles H. tpurgeon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정직하게 응답하고 자신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수하는 문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먼저 그 사람에게 영적인 자질이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증거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목사로 안수받는 것은 이미 자질이 있는 사람으로 앞으로 자기가 받은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공적으로 제공받을 것입니다.

안수는 이미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여 세우는 의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지도자로 세움을 받을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인가 하는 물음이 거의 없습니다. 그의 영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없습니다. 그의 도덕성에 관한 책임있는 발견이 없습니다. 안수는 사실 심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적인 순결이 요구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 22절을 보세요.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했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 나오는 정결이란 언제나 성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의 순결,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이 문제 때문에 넘어집니까? 이 문제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교회가 교회 역사 속에서 어두움을 경험해 왔는지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시대가 달라진다고 하여도 이 문제만은 교회가 철저해야 합니다.

이미 생각한 바에 있는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도 이 정절에 대한 강조가 있었습니다.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 하셨습니다. 5장 2절에도 보세요.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하므로 자매에게 하듯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만큼 이성과의 접촉이 번번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만큼 쉽게 시험에 들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23절을 보세요.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서 감독의 직분을 감당하려면 ‘술을 즐기지 않아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를 다니면서도 술을 좀 하시는 분들을 이 구절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런 이유로 술을 마시라는 말씀이 아니라 건강의 이유로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의학이 발달되지 못한 그런 시대적인 상황에서는 포도주는 아주 중요한 약으로 사용되었었습니다.

지도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지도력이 관리를 위해서 그리고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서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건강이 좋지 않으면 일에 대한 의욕도 없을 뿐더러 일을 활발하게 추진할 수도 없고 성도들을 돌보는 데나 말씀을 준비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하는 데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24절을 보세요.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죄는 발견될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폭로되기 마련입니다. 25절에 “이와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그의 삶이 선행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범죄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까?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지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심각하게 고려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 간증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좋은 점도 있지만 좋지 않는 영향을 끼치는 점도 없지 아니합니다. 어떤 사람이 변했다고 해서 그의 과거가 미화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과거는 여전히 수치스러운 과거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영웅시 하다 보니까 과거까지 미화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난 다른 말입니다. 과거에 범한 죄가 결코 정당화 될 수 는 없습니다.

물론 용서를 받읍시다. 그러나 용서를 받았어도 그의 잘못된 과거는 잘못된 과거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울 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그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켜볼 시간이 없으면 우리는 그 사람에 관한 충분한 자료를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중을 기해서 주님 앞에 한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도자의 실수와 범죄는 그 한 사람에게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어야 하고 우리 모두의 수치여야 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를 위해서 꼭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신중히 세워야 합니다.

많은 교회가 당장의 필요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못하고 지도자를 세웠다가 얼마나 진통을 겪습니까? 여기 우리 한국 교회의 아픔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했기 때문에 당하는 아픔인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자세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한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한국 교회에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교훈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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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목사] 지도자에 대하여 - 뉴스포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지도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지도력의 위기를 맞이한 시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어떤 분이 지도력의 위기를 두 가지 측면에서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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