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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목사 설교

[박조준목사] 더 잘 섬겨야 합니다 - 뉴스포유

디모데전서 6 : 1 ~ 2

사도 바울 당시에 심각한 사회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노예제도 였습니다. 노예는 두 가지로 생겼는데 전쟁에서 포로가 되면 노예가 되었고, 많은 빚을 졌는데 도저히 갚을 길이 없을 때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에는 노예가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한때 로마 사회에서 노예가 최고로 많을 때는 노예의 숫자가 일반 자유 시민의 4배나 되었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노예가 많아지면서 자연히 교회 안에도 노예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주종 관계라는 윤리적인 문제로 대두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잘못을 범하게 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주인이 노예에게 범할 수 있는 잘못입니다. 주인의 마음속에는 종을 종으로만 부리려는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인도 예수 믿고 종도 예수를 믿는 경우에 그들의 관계는 단순히 주종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형제의 관계라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령 빌레몬서를 보게 되면 도망친 종의 문제를 다루면서 종으로서 옛 주인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그리고 주인은 자기에게 돌아오고 있는 중 오네시모를 어떤 자세로 받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단순한 종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같이 부르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입장에서는 계속 그 종을 종으로 부리기 원하는 주인 의식 때문에 형제보다는 종이라는 의식을 더 강요할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의 입장에서 범할 수 있는 잘못입니다.

종이 주인에게 자기를 종이 아니라 형제로 대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자기의 현재의 사회적인 신분이 종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는 주신 말씀에서 이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형제라는 신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인 신분을 같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그것을 상종하게 변혁시키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주인과 종의 입장에서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경우를 성경은 꼭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종이 믿지 않는 주인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2절에 보면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아마 1절에서는 믿지 않는 상전을 가리켜 말한 것 같습니다. 성경을 믿는 종이 믿지 않는 상전에게 대해서 어떤 자세로 대하라고 합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상전을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공경은 단순히 주인이 하는 말에 ‘네’하고 대답하는 순종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이라 했지요. ‘멍에’라는 말은 짐승에게 메우는 짐을 의미하는데 목에다 멍에를 메우고 밭을 갈고, 수레를 끄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멍에 아래 있는 중들’이라는 말은 그 당시에 종들이 얼마나 가혹하게 시달리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종들은 말하자면 짐승처럼 부렸고 그렇게 대우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잘못된 생각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절대로 노예제도가 바람직한 제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예제도는 바람직한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종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쇠사슬을 끊고 궐기해야 한다는 선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성경이 종으로 있는 사람에게 그들의 주인을 공경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성경은 종의 제도가 결코 타당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종의 제도 자체가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종된 자들은 주인에게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 믿는 종이라면 그가 관심을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이 어떻게 종의 신분에서 풀려 지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된 자리에서 풀려나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타당한 희망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권리에 대한 주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의 삶에서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가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관심은 내가 어떻게 하면 천한 자리에 있고 주인에게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의 신분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종이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관심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서는 어떤 이유를 들고 있습니까?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종이 자신의 안일에 대한 관심을 접어 두고 먼저 주인을 공경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종의 제도가 하나님이 허락하실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주인이 믿지 않는 사람일 경우, 예수 믿는 종이 덮어놓고 자기 권리만 주장하고 좀 더 편히 살기를 위해서 자기의 입장만 내세우게 된다는 믿지 않는 주인이 예수 믿는 종에게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저 사람 아주 이기주의자인데, 예수를 믿는다면서 말이야”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그 주인이 예수 믿고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좀 더 평안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게 더 많은 이익이 돌아올까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은 아닙니까?

아니면 이 상황 속에서 내가 이렇게 허세하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내가 이렇게 하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상에 어떻게 드러나게 될까? 생각하면서 사십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의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지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가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종의 신분에서도 자유 이전에 하나님의 명예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행동이 끼치게 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의 제도 자체가 대단히 불합리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종에게 순종과 공경을 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종이 예수 믿는 주인에게는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2절을 보세요.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전하라”

여기서 두 가지로 말씀하는데 그 하나는,

주인을 경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예수를 믿고 종이 예수를 믿는다면 주인과 종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입니다. 주인도 종도 하나님을 함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같은 그리스도인이고 서로 형제라는 사실 때문에 지금 내가 처해있는 사회적인 위치나 신분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여기 같이 예수 믿는 분들이 계십니다. 한 분은 그 회사 사장이고 다른 분은 그 회사 사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분을 사회적으로 말할 때 한 분은 사장님으로 모실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상식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니까 우리는 다 한 형제이니까 마땅히 나를 이렇게 대접해야 한다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있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인권을 주장하기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해서도 안됩니다. 누구는 귀하고 누구는 천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동등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사람의 구별은 있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은 없습니다. 옛날에는 남존여비의 사상이 있지 않았습니까?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구별은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장과 사원의 차별은 없습니다. 사장은 귀하고 사원은 천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장과 사원의 구별은 있어야 합니다. 사장은 대우가 사원과 다릅니다. 이것은 차별이 아닙니다. 구별입니다. 사장에게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형제라고 해서 경히 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주인을 더 잘 섬기라고 합니다.

왜 예수 믿는 상전을 더 잘 섬겨야 합니까? 우선 그가 믿음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사랑은 의무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인이 되고 우리가 함께 형제가 되어 함께 사랑해야 하는 관계라는 사실이 내가 상대방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랑은 결코 의무를 배제하지 아니합니다. 골로새서 3장 22절 이하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더 잘 섬기라는 말씀의 설명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했습니다.

이 말씀은 한결 같은 마음과 신실한 마음이 예수 믿는 종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주인을 흡족하게 하도록 섬기는데 반드시 필요한 자세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교훈은 순종의 적극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종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순종해야만 합니다. 비록 그 주인이 그를 칭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상을 받을 것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는 종의 제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원리를 적용한 고용 관계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노동자, 예수 믿는 사원은 최고의 노동자, 최고의 사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누가 지켜보든 지켜보지 아니하든 상관없이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는데 하나는, 일하는 태도요, 다른 하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합니까? 성실한 자세로 일해야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성경은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실이란 무엇입니까?

일하는데 거짓이 없는 성실입니다. 무슨 일이나 정성껏 성심성의껏 하는 것입니다. 내 능력과 내 양심과 내 지혜를 다해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무책임하게 하는 것은 성실의 태도가 아닙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우리가 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큰 일에도 충성하고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일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공적인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 남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저마다 하는 일에 온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모든 위대한 것, 모든 가치 있는 것, 모든 소중한 것은 다 정성의 산물이요 성실의 결과입니다. 물건 하나를 만들어도 정성껏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소위 무한 경쟁 시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양보가 없는 치열한 경쟁이 전쟁을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기고 살아 남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수한 물건을 만드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우수한 물건을 만들 수 있습니까? 정성을 다 해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재수생이 없습니다. 연습이 없습니다. 그날 그날이 결승전이요 그 때 그 때 하는 모든 일이 말하자면 시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매일 매일을 살아야 합니다.

성실이 무엇입니까?

허망한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속이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이 성(誠)의 근본입니다. 성이란 글자의 구조가 의미심장합니다. 말씀 언(言)변에 이룰 성(成)자가 결합한 것입니다. 성(誠)이 무엇입니까? 말한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은 말의 완성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였다”고 약속했으면 남에게 약속한 그대로 실천하여 이루어 놓는 것입니다. 말은 해 놓고도 이루어 놓지 않는 말은 거짓입니다. 이제 두달 후면 지방자치제의 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입후보로 나오는 분들은 찬란한 공약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국민의 공복으로 출마하는 분들이 성실해야 합니다. 말은 해 놓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국민을 기만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국민들은 성실한 일꾼을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지방이 아니 나아가서는 나라가 바로 설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항상 실현하기를 힘써야 할 한의 기본적인 덕이 있다면 그것이 곧 성실입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이 위대한 사상가와 철인들이 이 성실의 원리를 가장 강조한 것입니다. 성실은 인간의 근본적인 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성실한 사람 착한 사람입니다. 착한 마음, 선한 뜻, 성실한 삶은 그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성실성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는 충실한 사람이요, 성실성이 적으면 적을 수록 그 사람은 허망한 사람입니다.

사탕은 단맛에 따라서 그 진가가 결정이 되고 소금은 짠맛에 따라서 그 가치가 좌우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그 성실성에 의해서 그 인격이 결정됩니다. 우리말의 참은 성(誠)을 의미하고 충만을 뜻합니다. 물이 병에 가득 차면 충만의 참이 됩니다. 성실의 덕으로 가득 찰 때는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실의 덕이 적을 때는 헛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나도 상실하기를 힘쓰고 너도 성실하기를 힘써서 서로가 만날 때 우리는 깊은 인격적인 만남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도 거짓되고 너도 거짓되어 우리가 거짓의 자리에서 서로 만날 때 우리는 허망하고 불행한 만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격과 인격으로 만나려고 하면 나의 성실성과 너의 성실성이 서로 만나야만 합니다. 인경의 만남은 성실성의 만남이요 성실한 마음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우리는 서로 성실한 자리에서 만나야 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성실한 것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이 우주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납니다. 콩 심은데 팥이 나는 법 없고 팥 심은데서 콩 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 우주와 자연에는 엄연한 인과의 법이 있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습니다.

사람은 작기가 심은 것을 거둡니다. 심지 않고 거둘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심지 않고 거두려고 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얻으려고 합니다. 공부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요 욕심인 것입니다. 자연은 사람을 속이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속입니다. 사람이 행위에는 거짓과 허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힘쓸 것이 무엇입니까? 성실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된 우리도 성실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에게 성실성이 없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습니다. 물건 하나를 만들어도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만들어야 그 물건이 쓸만한 물건이 됩니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만들 때 그 물건이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성실성이 없는 대화. 그것은 무의미한 잡담이지 진정한 대화가 아닙니다. 성실성이 없는 교훈 그것은 지식의 전달은 될 수 있어도 생명있는 교훈은 될 수 없습니다. 성실성이 없는 정치, 그것은 국민을 위한 정치가 될 수 없습니다. 성실성이 없는 말, 그것은 결코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가 없습니다. 성실성이 없는 글 그것은 읽는 사람의 가슴에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성실성이 없는 행동에는 힘이 없습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성실성이 없을 때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성실은 나와 남을 속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성실은 도덕의 근본입니다. 더구나 성실은 무슨 일을 하거나 우리의 전력을 다 합니다. 최선을 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 하십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전력을 다 합시다. 이것이 성실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까?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서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을 끝까지 성실하게 사는 사람만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일은 성실하게 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신의가 있어야 합니다. 신의가 무엇입니까?

서로 속이지 않고, 서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믿는 것이 신의입니다. 신(信)은 말한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문의 신(信)은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이 합한 글자입니다. 사람의 말은 모름지기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을 때 말로서의 자격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말에 거짓이 없는 것이 신의입니다. 그러므로 믿을 신(信)자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믿을 신자와 관계된 글자를 생각해 보세요.

믿으면 쓸만해서 신용(信用)이라 합니다. 믿기 때문에 맡깁니다. 그래서 신임(信任)이라 합니다. 믿으니까 부탁합니다. 그래서 신탁(信託)이라 합니다. 믿으면 의지합니다. 그래서 신뢰(信賴)라고 합니다.

믿을 신자로된 말 중에 나쁜 말이 없습니다.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기본 도덕이 신의입니다. 신의가 무너질 때 인간관계의 기본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설 땅이 어디입니까? 신의의 땅입니다.

인격은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을 수 없는 인격은 인격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사실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닙니다. 믿을 수 있으려면 진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믿으면 뭉칠 수 있고, 뭉치면 힘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 번영할 수 있고, 부강할 수 있습니다. 속이고 거짓말하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지 못하면 단결이 안됩니다. 단결이 안되면 힘이 안 생깁니다. 힘이 안 생기면 허약해지고 쇠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힘의 근본은 신의입니다. 서로가 믿지 못할 때 우리는 불안하고 불평합니다. 세상에 불신처럼 무섭고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계약 사회라고 합니다. 계약 사회는 서로 믿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서로 믿지 못하고 약속을 지키지 아니할 때 계약 사회는 성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실한 사람, 신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무슨 일을 하나 주님께 하듯 하면 성실해 질 수 있고 누구를 대하나 주님을 대하듯이 하면 신의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가 처한 사람의 자리에서 정말 그리스도인답게 살므로 그곳에서부터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작은 한 자루의 촛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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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당시에 심각한 사회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노예제도 였습니다. 노예는 두 가지로 생겼는데 전쟁에서 포로가 되면 노예가 되었고, 많은 빚을 졌는데 도저히 갚을 길이 없을 때 노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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