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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목사 설교

[박조준목사]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 - 뉴스포유

디모데전서 3 : 1 ~ 7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인격, 사람됨이 어떠한가’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열매가 좋으려면 나무가 좋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어떤 사람이 많은 일을 하는데 그 인간됨이 좋지를 못해서 그 사람이 한 모든 일들이 전혀 하나님께 영광되지 못하는 경우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의 자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전서 3장 1-7절까지 에서는 지도자 중에서도 감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독이라는 말은 오늘의 교회에서 목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본래 초대 교회에서는 오늘과 같은 제도화된 목사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초대 교회는 교회 조직이 아주 단순했는데 양무리를 감독하고 지도하는 지도자들과 그 지도자를 보좌하고 섬기는 사람들 이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지도자들을 감독 혹은 장로로 불렀습니다.

 

신약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감독과 장로는 별개의 직책이 아니라 하나의 직책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독이라는 것은 양무리를 감독하고 다스리고 돌본다는 기능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반면에 장로라는 말은 모든 사람 앞에 존경을 받을 만한 어른이라는 인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아도 교회의 지도자의 자질을 말하면서 두 종류의 지도자가 등장합니다. 1-7절까지에는 감독에 대해서 말씀하고 다음 시간에 다루게 될 8절 이하에서는 집사의 책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초대 교회에서는 감독과 집사, 지도자와 지도자를 돕는 집사의 단순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 초대 교회때 모습 그대로 닮아가려고 힘쓰고 있기 때문에 목사와 집사(권사를 포함해서)로 교회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감독의 자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감독이라고 부른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감독의 세 가지 기능이라고 말씀할 수도 있습니다.

 

첫째 기능은, 감독은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을 선포하므로 양무리의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6:4)

 

둘째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이단이나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을 보호하듯이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은 성도들을 잘못된 가르침에서부터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단은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이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복음을 믿고도 신앙이 흔들리는 성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되려면 세상의 학문을 다 배우고 그 뒤에 신학을 공부해서 심령을 지도하는 것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이 있습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사랑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성직자를 신부(神父)라고 합니다. 영어로도 Father라고 부릅니다.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아버지와 같은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가 여러분의 재산을 늘려 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 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세상 지식을 향상시켜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다른 것을 몰라도 여러분의 심령을 얼마나 사랑한다는 사실만은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목사는 자나깨나 여러분의 심령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있는 그 일을 위해서 전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나 무슨 일을 하나 여러분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을 아신다고 하면 오해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목사가 볼 때 저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생각되면 성도들에게 조심시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것을 오해해서 우리 목사는 그런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러고 그런 체험이 없어서 그런다고 하면서 수군수군하여 다른 성도들을 이끌고 이상한데 찾아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데로 다니다가 잘못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이비 기독교 지도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셋째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은 통해서 성도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그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도덕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도덕이 기독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도 기독교는 도덕이 기반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도덕을 떠난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어떤 분은 기독교라는 도덕적이 못된다고 하는데 사실 기독교만큼 도덕을 강조하는데는 없습니다.

 

도덕률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부모공경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 기독교만큼 부모공경을 강조하는 종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흔히 제사 드리지 않는 것을 꼽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살아계신 부모님을 잘 섬기라고 가르칩니다. 세상 떠나면 잘 섬기려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음식을 차려 놓으면 그 영혼이 와서 그것을 드십니까? 기독교에서는 소용없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 떠난 부모님을 위하는 길이 있다면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실 때 부모님이 소원하시던 일, 또는 살아계시다면 무엇을 원하셨을까를 생각해서 그것을 실현해 드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감독은 그 양무리가 도적적으로 바로 살아가서 타락하는 자리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 돌보는 일을 하는 것이.

 

오늘 주신 말씀에서 바울의 감독에 대한 일차적인 관심은 자질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몸된 교회의 감독은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여기 ‘사모한다’하는 말은 원문에 보면 ‘야망’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야망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한번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그분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나 자신을 바치는 삶, 이것은 바람직한 야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소위 일류 학교에 가도록 지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울러 그들을 하나님 앞에 드리며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받는 사람이 되도록 격려할 수 있는 부모님들이 많이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가령 여러분의 가정의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우수한 대학을 졸업했습니까? 좋은 직장에 가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는 유능한 사람인데 “부모님 제가 신학교에 가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서라 그것만은 안된다. 너 공부한게 아깝다” 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상한 것으로 교회에서 성실하게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시는 직분 가운데 자녀들이 주님의 일을 위해서 헌신한다고 나서면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엄격히 말하면 이중인격의 소유자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얼마나 귀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 신하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을 알고 있다면 그렇게 살겠다는 것을 격려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람직스러운 야망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도록 자녀들을 격려하고 도전하는 부모님들이 많이 일어나야 이 나라가 복을 받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어떤 부모님은 교회의 직분까지 맡고 있으면서도 자녀 중에 공부 실력이 모자라는 학생이 있으면 “너는 신학교나 가라” 하는데 사실 엄격히 말하면 이것처럼 하나님께 불경스러운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사람은 우수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변변치 아니한 사람을 하나님게 바친다면 하나님의 교회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외람되게 생각될지는 몰라도 한국 교회가 많은 부흥을 가져 온 것이 사실이나 교단이 난잡하면서 서로 경쟁적으로 신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모집해서 해마다 6,000여명의 신학생이 졸업하게 되는데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 얼마나 죄송한지 모릅니다. 사역자의 길이 저하되면 교회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오늘 주신 말씀에서 지도자의 자질은 우선 오늘의 목사와 같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자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교회 안의 모든 영적 지도자들에게 요구하시고 기대하시는 자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이런 자질을 갖춘 사람은 이 지상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다 할지라도 이 완전한 인격을 지향하는 태도와 자세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도자된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이런 자질을 갖추기 위한 진지한 노력이 그들의 삶 속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는 못해도 되어 보려고 힘쓰는 것이 사역자의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지도자들이 주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점검 할 때마다 묻고 또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신 말씀에서 교회 지도자의 자질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소극적인 면에서 말하면

 

첫째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2절에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여기서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원문에 의하면 결정적으로 흠잡힐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 이러한 면이 강조되었겠습니까? 그들이 교회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한 지도자가 결정적으로 그 자질을 의심받기 시작할 때 교회라는 공동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이 중요한 자질을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소극적인 자질에서 첫째로 꼽은 것입니다.

 

둘째는 술을 즐기지 아니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에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이런 면이 강조되었을까요. 성경이 지도자의 자격을 말하면서 술의 문제를 지적한 까닭은 그것이 자제력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하게 되면 자제력을 상실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술을 마시면 자연히 실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지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이 있는데 술을 마시게 되면 지적인 것부터 마비가 되기 때문에 감각적인 것 본능적인 것 동물적인 것만 남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술을 많이 마시면 짐승 비슷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한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은 교회 전체의 방향을 그르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의 실수나 범죄는 교회 전체의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째는, 구타하지 않고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구타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실컷 두들겨 패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꼭 두들겨 팬다는 의미보다는 포악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편에서 먼저 싸우려고 덤비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툰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변호하면서 다른 사람과 말다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지도자의 자질을 말하면서 이 두 가지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지도력이 있어서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요구하는 자길 가운데 하나는 섬김의 자세입니다. 만일에 지도자가 전투적인 자세로 다른 사람과 말다툼만 일삼게 된다면 이것은 지도자로서 결정적인 결함인 것입니다.

 

네 번째는 돈을 사랑치 않아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 하반 절에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면 돈을 사랑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지도자는 돈을 만질 기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가 돈을 사랑할 경우 돈을 만지는 기회가 부정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파괴 할뿐 아니라 교회의 우상을 망가지게 하게 됩니다. 지도자는 돈이 없이 살 수 있다든지 돈이 필요없다는 말하고는 다릅니다. 지도자도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새로 입교한 자가 아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을 새로 시작해서 그 신앙이 성숙하지 않은 사람을 지도자로 세울 경우 그는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는 지도자의 특권을 즐기는데는 열중하면서 그 책임을 잊어버리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로서의 온갖 탈선이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적극적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이 무엇입니까?

 

첫째,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가정 생활의 덕을 강조한 것입니다. 아내에 대한 성실성이 모든 것에 대한 성실성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절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절제하지 못하면 그는 모든 상황 속에서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모든 면에 절제의 덕을 갖춘 사람이어야 지도자로서 그 기능을 바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근심함과 아담함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사용된 ‘근신’이란 말은 내적인 마음의 태도를 뜻합니다. 그리고 ‘아담함’이란 말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을 다스리는 질서있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 마음의 태도가 신중하지 못할 때 그는 결국 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자신을 다스리는데 실패한 사람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을 바로 하리라고 기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삶을 다루는데 있어서 질서가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은 교회를 질서 있게 운영할 수 없고 교회의 방향을 바로 제시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넷째는 나그네는 잘 대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는 지도자들이 계속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섬기고 지도자를 섬기는 섬김의 자질이 없다면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다섯째는 가르치기를 잘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목사와 교사라는 단어를 한 직분을 언급하는 것으로 썼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은사 가운데 목사와 교사가 나옵니다. 이 두 가지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목사이면서 교사라는 말입니다. 목사는 가르침을 통해서 성도의 신앙을 양육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말씀을 선포하고(Kesigma) 또한 가르쳐야 (Sidake)합니다.

 

여섯째는 관용해야 합니다.

 

‘관용’이란 말은 ‘덮어준다’는 뜻입니다 남의 약점을 들추어내고 고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지도자는 다른 사람에 관한 결정적인 약점이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비밀로 지켜 주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의 약점이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신중히 도와주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장소는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는 가정이 행복해야 합니다. 가정의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라면 교회에서도 지도력을 발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덟째는 외인에게도 선한 증거를 얻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외인이란 말은 물론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되려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못하면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마귀’라는 말 속에는 ‘참소자’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마귀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성도들에게서 참소할 결함을 찾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 무슨 잘못된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아는대로 불신자들이 잘못이 드러나면 그것이 별로 뉴스 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잘못하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굉장한 뉴스가 됩니다. ‘저 예수쟁이가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이 제일 먼저 받는 비판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세요. 마귀는 성도들의 약점을 예리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끊임없이 이 사회 속에서 감시당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들 사이에서 주목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양회에서나 교회 직원들에게 우리는 어항 속의 고기처럼 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살아가자고 합니다. 무슨 흠이 없어 집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없는 것도 만들어 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해명이 필요없이 지켜보면 알 것입니다.

 

우리가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는다는 것, 이것은 교회의 간증을 지키기 위해서도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사회의 평가가 어떠한가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사회의 평가가 나쁜 사람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회에 덕을 세우고 유익을 끼친다는 것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30여년을 목회하면서 이런 사람 저럼 사람을 많이 지나 보았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너무 진리인 것을 봅니다.

 

이제 끝으로, 그러면 어떤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까?

 

믿을만한 지도자여야 합니다.

 

도덕적으로도 성도들에게 신뢰를 받을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기능적인 면에서도 다시 말해서 가르치기도 잘해서 말씀을 잘 가르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도 신뢰받을 만한 인격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 삶에 결정적인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험담을 들을 만한 잘못을 저질렀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찾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는 ‘나는 신뢰받을 만한 사람인가 내 신뢰에 금이 갈 수 있는 결정적인 실수를 피하고 있는가’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가 되려면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맺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정과 사회 속에서 책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책임 있는 아버지, 책임 있는 어머니, 책임 있는 남편, 책임 있는 아내, 책임 있는 자녀로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사회에서는 자기의 책임을 바로 감당하고 있는가. 한 가정에서 한 사회에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지도자가 되어 책임을 바로 감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누가 책임 의식을 가지고 삽니까? 주인 의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인 의식이 있는 사람은 책임 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손님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책임 의식이 없습니다.

 

무엇하나 보아도 주인의 마음으로 보는 것과 손님의 마음으로 보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주인의 마음으로 책임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생각한 말씀은 일차적으로 교회를 목양하는 목사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생각하면 교회 안에서 책임을 지고 일하시는 모든 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통해 주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하나 하나가 바로 살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역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