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박조준목사 설교

[박조준목사] 주의 일을 맡은 사람 - 뉴스포유

디모데전서 3 : 8 ~ 13

이미 말씀드린대로 디모데전서 3장은 교회의 사역자들의 사람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인 감독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집사의 자질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초대 교회는 아주 단순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령 빌립보서 1장 1절을 보세요.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직분이 감독과 집사였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목사라는 말이 거이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에베소서 4장에 꼭 한번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목사의 개념과 같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당시에는 목사를 감독이라고 불렀습니다. 감독이라는 말은 요사이 감리교회에서 지방회나 연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사의 직책이 아니라 양무리를 감독하고 그들의 신앙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책임을 지고 있는 지도자들을 감독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렇게 감독과 함께 교회의 지도자로 쓰임 받는 사람들이 집사들이었습니다. 감독이 교회의 자도자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집사는 감독을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했었습니다. 집사라는 말을 영어로는 doaeon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종, 혹은 조력자라는 의미입니다. 초대 교회 때도 보면 실제적으로 이 집사의 직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서 세워진 직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집사의 직분이 왜 세워졌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1절을 보세요.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 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초대 교회에 예수 믿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초대 교회 안에서도 이방인 문화에 더 많은 영향을 받은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에 사소한 인간적인 갈등들이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초대 교회를 생각하면 그저 은혜가 충만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교회로 생각하지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라는 데는 사람이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런 문화적인 갈등을 포함한 여러가지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령 지금 미국 같은데 보면 어느 도시 어느 지방에 가도 크고 작은 것은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한국 교포 교회가 미국 전역에 없는 데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문화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미국에 30년전에 간 사람은 미국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 있어서 미국화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미국에 이민 가신 분들은 미국에 가서 집 사고 자동차 사고 살긴 하지만 아직 모든 생활양식과 의식구조가 한국적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오는 갈등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번 주초에 울산엘 다녀왔습니다. 거기도 여러 교회가 있는데 교인끼리 문제가 많아서 다투는 교회, 갈라져 나간 교회가 있어서 교회 안에 입힌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에도 좋지 않는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동안 이러한 문제들을 완전히 극복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이러한 문제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6장 2절을 보면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체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은 구제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누구를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갈라졌던 것 같습니다. 한정된 물질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다 도울 수는 없고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데 이쪽 사람은 이쪽이 정말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저쪽 사람은 그쪽은 그래도 좀 괜찮으나 이 사람은 정말 돕지 않으면 당장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초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였던 사도들이 누구를 도와야 하는 것 때문에 입장이 아주 어렵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쪽을 도우면 저쪽에서 불평하고 저편을 도우면 이 편에서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 돕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선포해야 할 중요한 책임을 소홀히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경에 보면 ‘공궤’라는 말 옆에 아라비아 숫자로 2라는 숫자가 적혀있지요. 그 장 아래 부분에 보면 2라는 숫자에 ‘재정 출납’이라는 다른 말로 풀이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제를 위해서 돈을 관리하는 복잡한 일입니다. 지도자들이 이런 일에 너무 깊이 관계하다 보니 영적인 능력이 상실되는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6장 3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택했다” 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말씀과 기도의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다른 모든 사무적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집사직이 등장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이 집사직이 등장한 기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사는 근원적으로 지도자를 돕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영적 지도자들이 다른 것을 걱정하기 않고 영적인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다른 모든 사역들을 담당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집사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교회의 집사가 되어야 합니까?

8절 이하에 집사가 갖추어야 할 자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집사는

1. 단정해야 합니다.

감독의 자녀들에게도 단정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절을 보세요.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11절에도 “여자들도 이와같이 단정하고”라고 말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도 9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라고 말했습니다.

‘단장’이란 말은 밖으로 보이는 옷차림이 단정하다는 의미만은 아니고 그 삶의 분명한 구심점이 있어서 질서가 잡혀 있는 모습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예수님이 주가 되셨기 때문에 그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질서가 잡혀 있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구심점이요, 성경이 요구하는 삶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집사도 단정해야 합니다.

2. 일구이언하지 않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집사가 특별히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성도들을 돌아보고 심방하는 일이었습니다. 심방을 하는데 문제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심방을 하다보면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을 대하다 보면 말에 실수하기가 쉽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을 하고, 저 사람에게는 그의 비위를 맟추는 전혀 다른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인격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내가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직분을 맡은 사람으로서 말의 실수가 없었는가? 이런 질문을 하므로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3. 술에 인 박이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감독에게 요구된 조건 중에 하나였는데 왜 술에 대한 문제가 집사에게도 요청됩니까? 지도자에게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덕 가운데 하나는 자제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도자가 쉽게 흥분한다든지 이성을 잃어버린다든지 하게 되면 공동체의 방향이 흩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 중에 하나가 자제력인데 이를 위해서 술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여기 말한대로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매’라는 표현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것 보세요. 술을 지나치게 많이 하지 말라는 뜻이지 술 마시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 않느냐고 합니다.

물론 초대 교회 때는 술을 마셨습니다. 그것은 흔히 약으로 썼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바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때는 약이 넉넉지 못했기 때문에 포도주와 같은 술이 약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술이 약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이 지금도 우리가 술을 약으로 쓸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술 아니고도 약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4.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 이 말을 하게 되었을까요. 집사의 기능은 재정 출납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 업무를 맡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돈에 대해서 약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도 교회에서 청지기적 성실성이 부족한 사람이 교회의 재정의 책임을 했다가 시험을 당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재정 출납의 책임을 맡은 집사의 자격을 이야기하면서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도 이런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초대 교회 때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열을 많이 했습니다. 교인들에게서 기증받은 것 가지고 집사들이 그 일을 담당했습니다. 이런 구제 사업을 담당하다 보니까 자연히 집사들의 손을 통해서 돈이나 물질이나 음식이 많아 오고 가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물질을 취급하는 사람이 청지기적인 성실성이 부족하게 되면 그로 인해 시험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가룟 유다도 회계 출신입니다. 요사이 사회의 물의 일으키는 일의 대부분이 돈과 관계되는 것 아닙니까? 옛말에도 ‘황금은 흑사심이라’했습니다. 아름다고 깨끗한 선비의 선비의 마음도 황금 앞에는 검게 되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5.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양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선물이요. Lmmenuel Kant가 말한대로 말하면 ‘도덕률’입니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요, 양심이 제구실을 못한다고 하면 사람 구실을 못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깨끗한 양심’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양심이 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양심이 더러워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양심의 판단이 흐려질 수 있고 나아가서는 양심의 판단이 왜곡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한 양심이 없이는 절대로 믿음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대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했습니다. 믿음과 양심은 다 필요한 것입니다. 배가 성공적인 항해를 하려면 강한 추진력과 방향을 바로 정해주는 지남침입니다. 그런데 그 강한 추진력이 믿음이요 방향을 바로 잡아주고 지남침이 말하자면 양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 이전에 언제나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만일에 내 양심이 잘못되어 있으면 거기에 믿음이 주어져도 그 믿음은 더러운 양심의 밭에서 자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에 보면 바울 사도는 이 믿음이라는 말을 양심과 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아마 초대 교회 성도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신앙이 있는 척 하면서 비양심적인 일을 많이 했던 사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사도 바울은 믿음과 동시에 양심의 중요성을 강조할 강력한 필요를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미 생각한 디모데전서 1장 5절에 보세요. “경계의 목적을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1장 19절을 보세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디모데전서 3장 9절에서도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렇게 믿음과 함께 양심을 강조했습니다. 회개의 바탕 위에서 참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면 어떤 순간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집사를 세울 때 적어도 회개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죄인도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조건은 회개한 죄인이어야 합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주님께 없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받으려면 진정으로 회개해야만 합니다.

6.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좀 자세히 말하면 시험하여 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 보면 그 사람의 열심만 보고 교회의 직분을 맡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사람의 덕스럽지 못한 행실이 주변 사람에게 커다란 아픔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감독인 경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대로 새로 입교한 사람은 절대로 감독으로 세워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한번 잘 못세우게 되면 그로 인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말고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성실한 사람을 세워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충분히 살피고 기도하면서 추천하고 세우는 것은 한 교회의 아름다운 경영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는 말은 성자를 세우라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따지고 보면 성자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책망’이라는 말은 결정적인 어떤 흠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최소한 지도자로 세워지는 사람은 결정적인 흠은 없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개인에게 수치가 될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복음 전파 사역에 큰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7. 경건한 가정 생활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11절과 12절을 보세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여자’라는 말이 집사의 아내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여 집사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어떤 사람의 주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집사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여자를 말하는 것을 보아서 집사들이 심방할 때 혼자서 한 것이 아니라 그 부인들을 동반할 것을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 때에는 남자만을 집사로 세웠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집사와 함께 일하는 사람의 자질까지도 그대로 넘길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여자’는 집사와 함께 일하던 여 집사이든 집사의 아내든 둘 중에 하나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 보면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 일지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볼 때 앞의 절의 ‘여자’라는 말은 여집사라는것 보다는 집사의 아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가깝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11절과 12절을 함께 묶어서 “집사는 아내를 잘 다스리고 자녀를 잘 다스려서 가정 생활에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문맥상으로 보아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 주신 말씀에서 ‘여자’가 여집사를 가리킨 것이냐 아니면 집사의 아내를 가리킨 것이야 하는 것 보다는 그 당시에 여성도들도 교회 사역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에 동참하고 있는 여성들의 자질에 관해서도 문제가 안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모로 보던지 교회 사역에 동참하는 모든 여성에게 해당하는 총괄적인 자격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13절을 보십시다.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 큰 보상을 주십니다.

그 하나는 ‘아름다운 지위’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지위라는 말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이 말은 좀 더 높은 계급을 얻는다는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지위’라는 말은 그런 의미보다는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했을 때 그 다음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어떤 단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지위’라는 말 대신에 ‘단계’라는 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좀더 좋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좀 더 중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도 책임을 잘 감당한 사람에게 칭찬하실 대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내가 큰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을 때 그가 그 일을 잘 감당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에게 좀 더 크고 중요한 책임을 맡긴다는 것은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좀 더 중요한 책임을 맡기셔서 그에게 아름다운 축복을 주신다는 약속으로 이해해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믿음의 큰 담력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담력이란 말을 확신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큰 확신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체험으로 아는 것은 봉사 없이는 믿음이 자라지를 않습니다. 시간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봉사를 해야 거기서 확신이 생기게 됩니다. 성경 공부나 기도 생활도 신앙 성장에 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봉사는 가장 훌륭한 신앙 성장의 지름길의 하나입니다. 봉사 열심히 하던 사람이 그 봉사 생활을 쉬어 보세요. 그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봉사하다 보면 어려운 일도 많습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갈등도 있습니다. 말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봉사하므로 어려움 당하는 것보다 봉사하지 않으므로 받는 손해가 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오랜 신앙생활 끝에 진정함 의미에서 회심을 체험하고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선교사 생활까지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배를 타고 항해하던 중에 풍랑을 만나 두려워할 때 모라비안 교도들을 통해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나는 왜 다른 사람들에게 선교한다는 사람이 지금 죽으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에 돌아와 어느 선배에게 자기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이제 위선적인 삶을 그만 두고 싶습니다.’ 그때 그의 선배가 지혜로운 충고를 했습니다.

“여보게 그만 두지 말고 믿어지지 않거든 믿어질 때까지 가르치고 믿어질 때까지 설교하게”

그래서 웨슬레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가르치고 설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설교하는 그 말씀을 통해서 마음속에 점차 환한 빛이 비취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회심의 체험을 통해서 주님을 신뢰하는 확신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좀 더 주안에서 커다란 확신을 얻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원하십니까? 주님을 섬기는 일에 들어서십시오. 그것이 아무리 작은 봉사라도 주님께서는 그 봉사를 통해서 여러분의 믿음에 큰 담력을 더하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 말씀을 같이 읽고 기도합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안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