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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목사 설교

[박조준목사] 중보기도의 사역 - 뉴스포유

디모데전서 2 : 1 ~ 7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디모데전서 1장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그의 믿음의 아들이요 에베소교회의 교역자로 세움을 입은 디모데를 권고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여러가지 잘못된 교리가 많이 있는데 바른 교훈을 따라 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 자신이 어떤 동기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 그의 신앙을 간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는 것은 말하자면 선한 싸움을 하는 것인데 그 싸움의 무기가 무엇인 것을 말씀했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이라고.

 

오늘 생각하게 되는 디모데전서 2장 1-7절 말씀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중보의 사역에 대한 중요성을 여기서 강조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에 보면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여기 ‘중보’라는 말이 나오지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중보라는 개념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참 진수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중보가 필요합니다. 이 중보자가 없이는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중보자의 갈망이 어떻게 성경에서 표현되었습니까?

 

구약 성경 욥기 9장을 보십시오. 이 중보의 개념은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비로소 계시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구약 시대부터 계속해서 이 중보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가령 욥기 9장 32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습니까?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습니까?

 

이런 물음에 대해서 욥기 9장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가 없도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중보자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중보자가 필요를 나타낸 곳은 욥기 뿐만은 아닙니다. 성경 다른 부분에도 기록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령 이사야 59장 16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죄인을 위한 중보자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 말씀 속에 나타나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로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라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그러면 ‘중보’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다리를 놓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 중보에 대한 개념은 본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분을 의미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중보라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용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심 말씀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중보의 사역을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중세기에 카톨릭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런 중보의 사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사제들에게만 주신 것으로 성경을 해석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들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 고백이 예수님께서는 만족스러우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고백은 네가 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네가 이 땅에서 내면 하늘에서도 맬 것이요 네가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카톨릭에서는 제 1대 교황으로 모시고 그에게 중보의 역할을 맡기셨다고 하면서 카톨릭 교회의 모든 사제는 교황을 대신하는 자로서 중보사역의 권한을 맡았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카톨릭 신자는 사제에게 참회하는 제도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사제는 신자가 참회하는 것을 다 듣고 하나님께 대신 비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최대의 발견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재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것이 모든 성도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아직도 개신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사장의 개념을 교역자에게만 적용시키고 평신도들에게는 적용시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 정신에 어긋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성경에 대한 무서운 오해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보세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 디모데전서는 특정한 교회의 지도자에게 그리고 일꾼들에게 쓰여진 편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경우에는 그 편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흩어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다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 2절을 보세요.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대로 이 편지는 그 당시에 흩어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 가운데서 2장 9절에서 말하기를 “오직 너희를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누구입니까? 목사를 의미하는 말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보혈로 구속함을 입은 모든 성도들이 바로 택하신 족속이고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5절에도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구속함을 입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절을 보세요.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성경은 이 제사장의 직분이 모든 성도들이 특권인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성도들이 제사장이라고 할 것이면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유한 특권 가운데 하나인 중보의 특권이 오늘은 새 언약의 빛 가운데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 특권을 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 새 언약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특권을 스스로 상실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주신 말씀 처음 부분에서 특별히 두 가지 사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보기도와 중보전도입니다. 중보기도라는 말은 우리가 많이 사용합니다만 중보전도라는 말은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적인 개념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장 1절에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사역에 임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바울이 먼저 강조한 것은 기도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들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이라고 하면 설교하는거나 개인전도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기도하는 것은 주의 일로 생각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주의 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말씀 전하는 것이나 전도하는 것은 활동성이기 때문에 주님의 일로 생각하지만 비활동성일 때는 주님의 일로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 주님의 일에 임하는 디모데에게 그가 첫째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이 바로 기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모든 사람을 상대해서 주님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모든’이란 말이 여러번 강조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하나님은 누가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6절 말씀을 보세요.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옛날 남에게 종으로 있는 사람을 자유인이 되게 하려면 재가 속전으로 돈을 주어 값을 대신 치르고 그 사람이 자유인이 되게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우리 대신 자기를 속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온 우주, 모든 사람을 상대로 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주님의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문자 그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과 모든 것을 드리신 바로 그 모든 사람을 상대로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절실히 느끼십니까?

 

가령 내가 직접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지 않아도 복음 선포를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 일에 내가 동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특권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분은 여기 나오는 단어를 기도의 네 가지 유형이라고 말합니다. 또는 중보기도의 단계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첫 단계는 간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간구는 기도의 태도입니다. 이 간구라는 말은 특별히 필요를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우리의 무력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왜 기도합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왜 부탁합니까?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무력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주님 앞에 기도할 때 주께서 반드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이라는 이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서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간구의 마음의 자세가 없이는 아무도 기도의 자리에 설 수가 없습니다.

 

둘째 단계는 기도입니다.

 

‘기도’라는 단어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도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첫째로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해야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하나님이 지금 내 기도를 듣고 계신다.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버지‘하고 부르는 그 순간 우리는 아버지 앞에 거세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그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한 많은 이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아룁니다.

 

셋째 단계는 도고입니다.

 

‘도고’라는 단어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중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을 도고라는 말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물론 자신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에 보아도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했습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내 병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다근 사람이 내 병이 낫기 위해 기도해 줄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분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했습니다.

 

넷째 단계는 감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응답 받을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도 귀하지만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좌관하시는 그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하며 교제할 수 있다는 이 특권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기도는 기도가 끝날 때 우리가 감사의 자리에 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내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하며 교제하는 가운데 이 영광스러운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내 이웃들의 필요를 갖다 놓게 됩니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시는 주님께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왜 말을 바꿔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했습니다.

 

우리가 중보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이는 아무도 중보의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드리는 기도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를 다르게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있는 그 엄청난 능력과 특권, 그것은 바로 십자가 때문입니다. 십자가 때문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담대하게 설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우리가 중보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주님에게로 시선을 돌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었을 뿐더러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이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유창하게 감동스럽게 기도를 잘 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우리의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을 허시고, 우리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므로 우리의 중보자가 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중보자로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2절을 보세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해야 하지만 특별히 임금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2절을 보세요.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지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결정은 바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평안한 생활을 위해서도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단순히 편하게 살려고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평면적인 차원의 기도가 절대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단어를 잘 살펴보세요. 기도해야 할 경우에 관해서 강조한 고요함과 평안함이라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고요함’이란 환경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이 환경에 참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것, 다시 말하면 모든 외적인 질서에 대해서 강조하는 단어가 ‘고요함’입니다 “평안함”이란 내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평안함이 어디 있습니까? 내적인 것입니다. 외부의 조건이 우리에게 평안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에 평안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안함은 내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때 내적인 평안함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속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것에 특별히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 ‘고요함과 평안함’이란 단어가 같이 강조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고요함과 평안함이 어떤 가운데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라고 한 말을 보세요. 경건과 단정은 어떻게 다릅니까?

 

“경건”이란 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본 덕목입니다. 경건한 삶, 그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죄에서 떠나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반면에 ‘단정하다’는 말은 언제나 사용된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이 ‘단정’이란 말이 몇 번씩 나옵니다. 가령 디모데전서 3장 4절에 보면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하고 말했습니다.

 

8절에 보면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11절에 보면 “여자들도 이와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이렇게 단정이란 말은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인간관계에서의 올바른 덕목으로 성경은 언제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고, 단정은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이러한 삶에 영향을 미치는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보의 기도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특권입니까? 우리가 이웃을 위하여 심지어 한 나라의 지도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는 이 특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만 주신 놀라운 기도의 특권입니다.

 

르로이 아임스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에 도착했을 때 가장 크게 후회하는 것은 우리가 기도했더라면 이루어졌을 그 놀라운 광경들을 천사들이 보여줄 때 ‘아, 내가 이것을 위해서 기도했더라면 이런 놀라운 영광스러운 사건이 일어났을텐데 왜 내가 기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기도는 역사를 바꿀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중보의 기도를 얼마나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가정을 위하여, 우리의 이웃을 위하여, 우리의 교회를 위하여, 우리 나라를 위하여, 이 세계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이 보다 더 고상하고 더 영광스럽고 더 놀라운 특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여, 우리에게 기도의 불을 밝히게 하옵소서.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