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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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1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나 사무엘을 불렀을 때는 단지 “아브라함아” 혹은 “사무엘아”라고 하시며 그들의 이름만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창22:1, 삼상3:4).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에 푹 빠져 있는 상태를 알렸고, 사무엘은 자신이 하나님의 전을 가까이하고 있음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시며, 엘리야를 부르실 뿐만 아니라 장소 곧 ‘여기’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어 영적으로 어두워진 엘리야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란 육신에 갇힌 ‘굴속’을 의미합니다. 이세벨에게서 도망 나온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19:14).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이 특심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하나님을 위하였을까요? 하나님이 엘리야를 위하셨을까요?
아합 때에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사방에 퍼져 있었습니다. 왕과 왕후가 그러하니 신하들도 자연스럽게 미혹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인데, 백성들도 우상을 섬기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엘리야는 미혹에 빠지지 않고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자신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극심한 가뭄 중에서도 엘리야에게는 그릿 시냇가를 지정하여 숨게 하셨고, 까마귀에게 명하여 떡과 고기를 가져다주도록 하셨습니다(왕상17:5-6).
또 그릿 시냇가 물이 마르자 시돈 땅 사르밧 과부에게 명하여 그를 공궤하도록 하였습니다(왕상17:9). 엘리야가 까마귀에게 명한 것도 아니고, 사르밧 과부를 스스로 찾아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와 이방 여인 사르밧을 통하여 그를 섬기도록 한 것입니다. 엘리야 스스로는 통 속의 가루 한 움큼과 병 속에 있는 적은 양의 기름으로 몇 년을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끊이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엘리야가 백성들을 많이 모아 놓고 바알 선지자와 경쟁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주셔서 단 위의 제물과 단을 태워주시지 않았다면 엘리야는 거기서 살아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신앙인들은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엘리야처럼 시험 들기 쉽습니다. 아마도 엘리야는 이렇게 시험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나의 열심이 이렇게 특심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바알 선지자들을 없앴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아합과 이세벨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게 하시는 걸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열심 있는 나를 잠시도 쉬지 못하게 여기까지 도망 나오게 하시는 걸까?’ 부언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께 시험 드는 이유는 엘리야처럼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위해 주시지 않지?’ 사람에게 시험 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에게 얼마나 잘했는데 고작 내게 돌아오는 것이 이거야?’
사랑의 채권자 곧 “나는 사랑을 받아야 하고” “나는 대접을 받아야 하고” “나는 인사도 받아야 하고” “나는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야.”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반면 사랑의 채무자는 “나는 사랑에 빚진 자야. 그러니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해” “나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는 대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 삶에 있어서 채무자가 된다면 상당히 괴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채권자가 아니라, 채무자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빚진 사랑을 우리는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보답의 표시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몸을 드리고,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웃을 섬김으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야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똑같이 여러분에게 “K야 어디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보답하는 자세를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뉴스포유 임성민 기자
강성률 목사(신촌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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