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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목사 설교

[박조준목사] 선한 싸움의 무기- 뉴스포유

디모데전서 1 : 18 ~ 20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사역해야 하는가를 말씀합니다.

 

교역자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엄격한 의미에서는 다 복음이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싸움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절을 보세요.

 

“아들 디모데야 네가 내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했습니까?

 

선한 싸움은 어떤 싸움입니까? 여기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계로서 명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경계’라는 단어는 군대 용어인데 상관이 부하에게 내리는 명령을 의미합니다.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의 전쟁에 비유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한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언”이라고 할 때 우리 머리 속에 연상되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에 대해 미리 이야기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예언’이라는 단어를 보면 그런 의미로 쓰인 경우도 있지만 좀더 많은 경우에는 ‘삶에 대한 충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되겠는가라는 내용이 예언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자들이 가장 많이 외친 말은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으로 잘못된 삶에 대한 신랄한 책망과 고발과 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 나오는 ‘예언’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사건에 대한 일보다는 디모데가 지도자로 안수 받을 때 받은 ‘당신은 앞으로 이러이러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 일해야 합니다.’라는 메시지 였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너를 지도한 예언, 지금까지 너를 너되게 했던 하나님의 말씀, 이 말씀을 따라서 이 말씀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하는 말씀입니다.

 

선한 싸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싸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싸워야 할 싸움은 다른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말씀을 따라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평생의 싸움은 결국이 순종의 싸움입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순종하고 있는가? 우리의 사역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싸움입니다.

 

그러면 그 싸움을 무엇 가지고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19절을 보세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혈로 죄씻음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순간 믿음과 착한 양심의 축복을 받습니다.

 

‘믿음’의 바울은 디모데서에서 ‘믿음’이란 말을 어떤 의미에서 사용했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믿는 믿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20절에 뭐랬어요? “그 가운데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이 사람들은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그 믿음에서 파산한 사람들의 예입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디모데후서 2장 17절에서 다시 나옵니다.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네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했습니다.

 

망령되고 헛된 진리가 아닌 말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후메네오와 빌레도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절을 보면요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다 부활이 이미 지나 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니라” 했습니다.

 

언제 우리가 부활합니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단자들 가운데는 부활을 이미 지나간 것으로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서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특별히 성경에 나타난 바른 진리를 진리답게 믿는 믿음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첫 시간에 생각한대로 헛된 말이나 그릇된 교리와 대조되는 바른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바른 교훈에 대한 올바른 신뢰가 곧 믿음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서는 파선하였느니라”

 

배가 항로에서 이탈하여 파선했습니다. 믿어야 할 것을 믿지 못했을 때 올바른 진리를 향한 그 신뢰가 떠났을 때 일어나는 신앙의 파선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선한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는 올바른 진리에 대한 믿음이 계속적으로 강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떠나게 되면 우리 믿음의 근본적인 자리가 흔들리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을 바로 믿고 있습니까?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른 교훈에 관해서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싸워 나가야 할 신령한 전쟁에서 계속 확인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바른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 싸울 때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지키고 관리해야 할 중요한 영역으로 믿음과 함께 다른 한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그것이 착한 양심입니다.

 

믿음이 진리에 대한 믿음이라면, 착한 양심은 그 진리가 적용되는 삶의 자리로서의 착한 양심을 의미하는것입니다.

 

바울은 어느 다른 편지에서보다도 이 디모데전후서를 통해서 ‘양심’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양심이란 말은 헬라어에서는 ‘함께 안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나 혼자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기 행동에 어떤 기준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 기준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세대마다 다르고 문화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흔들릴 수 없는 기준에 의해서 행동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능적이고 생리적인 지식입니다. 우리가 그 지식에서 벗어날 때 우리 마음속에는 평화가 아니라 불안, 안정이 아니라 갈등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양심의 움직임입니다.

 

로마서 2장 15절에 보면 “양심은 우리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2절에 보면 “양심은 마음의 눈이라”고 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과 함께 보는 눈입니다. 양심은 마음의 등불이란 말도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기 원하실 때 우리의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양심은 우리 인생의 도덕적 생활에 있어서 말하자면 지남침의 역할을 합니다. 선과 악을 분별해서 어느 길이 바른 길이고 어느 길이 그릇된 길인 것을 말씀해 줍니다. 지남침은 언제든지 남과 북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보면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간다”고 말씀했습니다.

 

양심은 우리가 그릇된 길로 나아가려 할 때 경고해 줍니다. 위험신호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와가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을 때 양심의 경고가 있었습니다. 아담이 유혹을 받을 때도 경고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도 양심의 경고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죄를 범할 때 ‘이래서는 안된다’는 양심의 경고를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릇된 길로 나아가 죄를 범하게 되면 우리를 책망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괴롭게 하고 공포심이 들어오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다음 날이 서늘할 때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오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두려워서 동산 나무 뒤에 숨었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 지은 사람은 다 하나님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두려워서 그럽니다. 그래서 “악인은 좇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한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리 여인은 ‘너희 중 죄없는 사람이 이 여자를 돌로 치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다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다 그 자리을 피하게 만들었습니까? 양심의 가책 때문입니다. 무엇이 가룟유다로 하여금 어두운 밤에 나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게 만들었습니까?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양심은 우리가 그 양심을 순복해서 바른 길로 갈 때에는 우리를 칭찬해 주고 우리에게 상을 줍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을 때 양심의 경고를 듣고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이런 악한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부르짖고 그 유혹을 이겼습니다. 그 때문에 일시에 누명을 쓰게 되고 애굽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성경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비록 몸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화평했습니다.

 

양심은 이렇게 선악을 분별해 주고 우리를 경고해 주고 우리가 잘못할 때 가책해 주고, 우리가 잘 할 때 칭찬해 줍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귀한 양심도 잘못하면 타락할 수 있습니다. 디도서 1장 15절에 보면 “양심이 더러워 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선악의 분별이 희미해집니다. 도덕적 판단이 분명하지 못하게 됩니다. 양심이 약해집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 4장 2절을 보면 “양심이 화인을 맞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게 되면 아주 무감각하게 됩니다. 양심의 판단이 왜곡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런 사람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주신 말씀에서 착한 양심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죄 지은 일이 전혀 없는 그런 양심입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누구나 죄 짓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착한 양심은 전에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 받은 양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므로 우리의 양심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들어야 합니까? 우리 안에 주어진 양심이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과 함께 착한 양심을 강조합니까?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마지막 부분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지 못하고 탈선한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나오는데 디모데후서 4장 14절에 보면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라” 했습니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처음에는 같은 믿음을 가지고 바울 사도와 더불어 교제를 나누고 신앙 생활을 했던 사람들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고 양심을 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잘못된 교리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교리에 입각해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라는 생활 문제가 따르게 됩니다. 바울이 쓴 편지 중에 로마서를 위시해서 여러 편지가 다 먼저 교리 그리고 생활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는 그 믿음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

 

그 믿음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삶의 근거가 되는 이 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질 것을 권고할 때 믿음을 먼저 강조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후메네오와 같은 사람들은 진리에 관해서 왜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의 교리에 대해서 잘못된 사상을 갖기 시작하자마자 잘못된 삶이 따라오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마지막 절에 보면 “그 가운데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징계’라는 말은 바울서신에 있어서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처음에 순수한 믿음을 가졌다가 잘못된 경우 같습니다. 시작은 잘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잘못된 경우입니다.

 

그들에게 징계가 왔습니다. 그들은 처리하는 징계의 방법으로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징계하실 때 종종 그들이 이방 사람들에게 패하기도 하고 아주 어려운 일을 당하게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그의 백성을 내어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불신자의 손에 내어 주어 고난과 수모를 당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백성을 사단에게 내어 주어 징계한다는 표현을 초대 교회의 상황에 적용시킨 예를 고린도전서 5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집안에서 불륜의 범죄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럴 수 있을까? 물론 없어야 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훌륭한 지도자라고 해서 예외는 없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마비되고 그 양심이 파손될 때 그리스도인들도 여기까지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성령님이 임재하시기 때문에 나는 결코 그러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로 정말 위험한 것입니다. 혐오할 수밖에 없는 그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런 죄 문제에 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이것을 처리하려는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이러한 경향에 영향을 받아서 점점 무너져 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바울로 분노를 금치 못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4,5절을 보세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심각하게 징벌하시는 방법 중에 하나가 사단에게 내어 주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내어 주면 어떻게 됩니까?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이 경우에 그 사람의 구원이 잃어버린바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있는 사실을 주목할 만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어떤 사람의 구원 문제까지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은 멸하고”

 

그리스도인에게 올 수 있는 징계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징계는 육신을 멸하는 것입니다. “마귀야, 저 사람의 육신을 네 마음대로 하라”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최후의 단계는 목숨을 거두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단계를 넘어서는 일은 결코 할 수 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욥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사단에게 맡긴바 된 욥은 자녀를 잃고 재산을 다 빼앗기고 나중에는 온몸에 창질이 나서 가려워 못견디어 잿더미 속에 앉아 기왓장으로 몸을 긁을 정도가 되고 피골이 상접해서 친구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지만 욥의 생명만은 손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는 육신의 생명까지 거두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아직 목숨을 가져가는 단계까지 온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줄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지 않도록, 복음의 영광을 훼방하지 않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훼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에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믿음에 관해서 파선하고 양심을 버리고 은밀한 죄를 지으며 산다면 주님께서 마지막에 우리를 이렇게 징계할 수 있다는 이 엄격한 교훈을 우리는 지금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주님의 일을 감당키 위해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리의 영역과 생활의 영역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의 문제와 양심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통해서만 계시를 받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영감되어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까? 아니면 특별히 내게만 들려지는 음성을 듣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내게만 보이는 무엇을 보기 원하지 않습니까?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무엇을 느끼기를 원치 않습니까?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했습니다.

 

여호수아 1장에도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했습니다.

 

신명기 28장을 보세요.(1-1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시편 128편 1-2절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두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으로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했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배가 파선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항해해서 저 영원한 피안에 닿을 때까지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거리낌없는 삶을 살아가며 승리하도록 우리를 권면하시는 주님을 찬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