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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소식

[김준희목사] 코로나19 극복 위한 웨이크 데일리 기도 - 뉴스포유

주님께 간구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일생을 죄에 종노릇하다가

영원히 지옥불에 멸망할 운명이었던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거룩한 기업을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이 크신 은혜를 어찌 감당할 수 있으며 이 놀라운 사랑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이 나라 이 민족을 축복해주셔서 일제의 압제 속에

신음하던 이 땅에 선교사들을 보내주시고 복음으로 이 땅을

구원해주시고 치유해주셨습니다. 해방 후 공산화의 위기 속에

이 땅을 전쟁의 폐허 속에서 건져주시고 자유 대한민국에서

복음의 은혜 안에 풍성한 복을 누리게 하여주셨습니다.

이 땅의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마음껏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땅 끝까지 복음 전하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케 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이 크신 사랑과 은혜를 어찌 감당할 수 있으며

이 놀라운 사랑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데 주님, 우리는 지금 놀랍고 두려운 현실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있사옵니다.

코로나 19라는 생소한 바이러스가 온 나라를 공포에 떨게 하고

그 와중에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당의 문이 강제로 닫히고 비대면 예배라는 생소한 예배를

세상의 권력이 강제하는데,

더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은, 비대면 예배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다수의 교회들이 순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고 당황하여 주님 앞에 떨고 있는데,

주님,

이 일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님을 주의 말씀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성경이 전혀 어떠한 근거도 주지 않는 해괴한 영상예배를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는 예배의 타락이 이미 우리 안에서 굳어져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의 쓴 열매를 받아들고 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타락은 예배의 타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수많은 도덕적 타락과 가시적 범죄 이전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타락되어

영적으로 둔해지고, 분별을 상실하여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 팔려 망하는 길로 간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리는 순전한 예배를 포기하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안정을 도모한다고 하나님 대신 이방을 의지하여

정략결혼을 하고 수많은 이방 여인의 음탕한 웃음에 싸여

거룩한 나라의 곳곳을 우상의 신전으로 더럽혔을 때

나라가 두 동강 났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오직 한 곳 예루살렘 성전으로 예배드리러 가는 길을 차단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섬기게 하면서 백성들은 영적 분별을 잃고

잘못된 예배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아합 왕 때는 사악한 이세벨이 버젓이 바알과 아세라를 들여와

온 나라를 우상숭배로 가득하게 했어도 이미 거짓된 예배에 익숙해진

백성들이 우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밥 먹는 일만큼 쉬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불로 응답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했어도, 이미 영적 분별을 상실한 왕과 백성들은 익숙한 우상숭배의 삶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망했습니다.

 

남유다도 예배의 타락으로 망한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환상 중에 이끌고 가셔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왜 유다가 망할 수밖에 없는지,

왜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될 수밖에 없는지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식양대로 지어진 거룩하고 위엄 있는 성전,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식양대로 만든 거룩한 옷을 입고 성전을 드나드는 제사장들인데,

백성 위에 군림하며 온갖 종교적 치장으로 존경과 명예를 받던 제사장들이 거하는

그 성전의 은밀한 곳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배교와 타락의 행위가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투기의 우상을 세워놓고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면 벽에 그렸고

장로 칠십 인이 그 앞에서 향로를 들고 서 있고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였고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오 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였습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8:6)”

 

주님,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씀을 통해서 보면서,

이 시대에 우리의 두 귀를 울리시며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 분별을 잃어버리고 우리는 죄악의 역사를 그대로 반복하면서도

알지를 못합니다.

과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초대교회의 순전한 신앙을 전수받아

오직 예수님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오직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무서운 총칼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여

비굴한 육신의 삶 몇 년 더 연명해보자고 비겁한 타협하지 않고

모진 고문과 극한 시련과 죽음까지도 묵묵히 받아들였습니다.

우상 앞에 고개 한 번 숙이면 풀어준다는 유혹을 거부하고

주 예수의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고 부활의 믿음으로 죽음을 택했습니다.

북한이 공산화될 때도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주일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서 선거를 한다고 할 때 거부했고

이로 인해 고문을 당하고 죽음을 당해도 주일성수의 신앙을 포기치 않았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현실의 안위를 위해 타협의 쓴물을 먹고 비굴하게 살다가 죽었는데

순교자의 신앙은 우리의 지표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역사가 지나 되돌아보니 순교자들도 죽고, 타협한 대다수의 사람들도 죽었습니다.

그 몇 년의 목숨 부지하자고 한 치 앞의 만족을 위해 기꺼이 신앙을 포기한 이들의

반열에 서지 않고 우리의 후대가 우리의 시대를 기억할 때 순교자의 신앙 따라

한 번 밖에 없는 인생 오직 주님께 믿음을 지킨 역사로 기억되어야 할 터인데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풍요와 축복을 다 받아 누리고

순교의 피로 세워져 선교사명 감당하라고 축복하신 주님의 축복이

코에 차고 넘치자

우리 스스로 예배를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순교자들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는데

우리는 스스로 옷을 벗고 우상에게 몸을 내주는 간음녀가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이 기준이 되어 목숨 걸고 예배를 사수해야 하는 자들이

주일에 놀러 가라고 저녁 예배를 없앴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성도의 모임인 예배를 지키기 위해

몸집이 크면 분립해야 할 교회가 거대한 몸집을 키우고

수많은 교인들 수용하느라 어느새 자연스럽게 영상예배라는 것을 도입하여

본당에 못 들어간 사람들은 영상으로 예배드리는 기이한 일들이

자연스럽게 예배문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집에서 혼자 영상 예배드린다는 말이 놀라 기함하며 타락했다고 통탄한지

몇 년이 안 되었는데

이제는 영상예배가 있어서 어디서든 예배드릴 수 있다고

오히려 감탄을 하고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헌금하라고 계좌번호를 안내합니다.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이 괴이한 예배가 누구의 승인을 받아서

당당하게 예배의 문화로 자리매김했습니까?

예배가 문화입니까?

어느 목사님이 예배는 목숨과 같다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주님 앞에 어떻게 고개나 들 수 있을까

주님, 정말 얼굴이 뜨뜻하여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배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의 돈지갑을 제재하고 우리의 먹는 문제를 건드렸다면

우리는 이처럼 순한 양과 같이 받아들였겠습니까?

주님 앞에 너무나 뻔뻔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여주옵소서.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목회자들이 마음대로 비대면 예배는 아무 문제없다고 승인을 해줍니다.

목숨 걸고 신앙을 지켜야 할 시대가 우리 눈앞에 와 있는데

성도들을 영적 무지와 영적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우리의 죄악을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교회에서 예배를 지켜가기 위해 평소에 안 가도 되는데 가지 말고

육신의 즐거움 절제하고 경건하게 지내다가

준비된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 경건한 예배를 지켜가야 하는데,

오히려 육신이 즐길 곳은 다 찾아다니고 아무렇지 않게 누리다가

교회는 방역을 위해 비대면 예배드린다고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이렇게 예배를 하찮게 여기고

예배를 위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려하지 않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만 먹으니 싫다고 불평하여

주님이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가증한 탐욕을 부린 자들에 대해서 엄히 벌하셨습니다.

그 고기가 잇사이에 있을 때 그들을 징벌하셨습니다.

코에 넘치고 냄새가 싫을 정도로 고기를 먹게 하셨으나

그들은 그들의 탐욕의 죄악의 대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주님,

우리도 그 벌을 받고 있습니까?

그렇게 편하게 예배 보는 것(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이 좋으면,

그렇게 너의 육신의 만족대로

예배를 하찮게 여긴다면 마음껏 그렇게 하라고

비대면 예배의 상황을 주셨습니까?

우리의 가증한 예배, 우리의 썩고 문드러진 죄악의 악취를

더 이상 맡으시기 힘드셔서

예배당의 문을 닫게 하셨습니까?

 

주님, 이것이 주님의 징계일진대 우리가 어떻게 주님 앞에 반응해야 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주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까?

진정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신앙 양심은 이게 아니라는 것을 외치는데

우리는 공권력이 무섭고 교인들이 무서워서 타협했습니다.

어떤 분은 비대면 예배는 예배가 아닌데

비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자신을 탓하면서

하나님께 이 모든 책임과 벌을 자기가 받겠다고 말을 합니다.

주님, 당장 눈앞에 보이는 공권력 무섭고 교인들이 무서워서

자기 신앙양심과 타협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책임지겠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합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여기고 무감각하면 이런 말을 함부로 합니까?

과거 무서운 총칼 앞에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기꺼이 죽음을 택한

신앙의 선조들이 본다면 얼마나 괴이한 신앙입니까?

 

우리는 신앙을 위해 손해 보려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우리 속에서 외치는 성령의 음성,

신앙 양심의 소리에 대해서 귀를 닫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타락한 신앙, 타협하는 믿음에 익숙해 있어서

주님을 속이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런데 주님 안에서 올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상 권력에 맞서고 손해를 보고 욕을 먹고

미친놈 소리 듣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렇게 고난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고난 예찬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이

이 상황에서 예배를 지키기 위해 고난 받자고 하면

이건 고난과 상관없다고 합니다.

그냥 동영상으로 예배드리면 된다고 합니다.

정부방침 잘 따르면 된다고 합니다.

육신이 좋아하는 것을 안 하는 것이 분별의 방법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육신이 좋은 대로 행하면서

늘 주님을 속이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주님, 가르쳐주십시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 죄악과 타협하다가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서 이를 갈며 후회하는 인생 되지 않도록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십시오.

사람들은 회개하자고 합니다.

교회 문 닫고, 정부 눈치 보면서

우리는 비대면 예배했다고 사람들에게 안심시키면서

육신의 안일을 택해놓고

회개하자고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악에서 완전히 돌이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방역수칙 철저히 지키며

우리의 목숨보다 귀한 예배를 지켜가며

어떤 불이익이나 손해나 위협을 당해도

주님께 진정한 예배를 회복시켜달라고 울부짖으며

예배를 회복시켜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배당에 모여 드리는 예배를 드리기로 결단한다면,

이러한 결단을 한다면

어찌 금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주님께 매달리며 부르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피 마르는 심정으로 영적 순결을 위해

육신의 고난을 감당할 수 없는 나약한 인생을 주님께 맡기고

날마다 주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를 안 드릴 수 있겠습니까?

어찌 절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회개가 아니겠습니까?

주님, 우리를 살려주십시오.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회개한다고 말로만 하고

그저 유튜브 영상이나 보고 비판이나 하고

뒤에서 욕하고 앞에서는 타협하는 종교인이 되어

하나님의 집에서 떡 한 조각 위해 비굴하게 살아가는

죄인으로 주님 앞에 발견되지 않도록

이 땅의 목회자들이 정신을 차리게 하옵시고,

너무 멀리 와서 도대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신앙이

뭐가 다른지 분별을 못하게 된 이 영적 무지에서 깨어나게 하옵시고

이제라도 주님 앞에 회개하고 온전히 돌이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예배의 타락으로 이 나라가 미쳐 돌아가고 있사옵니다.

선을 악하다 하고 악을 선하다 합니다.

성경이 죄라고 명시한 동성애를 인권이라고 포장하고

오히려 차별금지법을 만들어 죄를 죄라 외치는 자들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으려고 사단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다니는 교육의 현장이 완전히 무너져

음란과 더러움의 독을 먹고 우리의 자녀들이 비틀거립니다.

그런데 예배의 타락으로 분별을 잃은 교회가

온갖 망령된 사람들을 교회의 수장으로 앉혀놓고

이제 교회가 앞장서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고 미친 짓을 해도

그들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영적 순결을 잃고 타협하며 살아온 우리의 죄악의 대가로

지금 우리는 예배를 잃어버리고

다음 세대들의 영적 도덕적 가치관이 마비되어 가도 손을 쓰지 못하고

이제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마저 잃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지금 바로 이 시점에서

주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계속 현실의 안위와 육신의 평안을 위해

비기독교 세력인 세상 정부의 비위를 맞추며

오히려 자기 형제를 희생양으로 권력에 제물로 바치려고 하며

주님 앞에서는

마음을 찢고 참된 회개로 돌이키지 않는 우리의 가증한 모습에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징계하실지

두려워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주님, 성령 하나님,

불로 우리를 태우소서.

우리로 정신을 차리게 하소서.

주님이 우리를 아주 멸하지 않으실 것이라면,

주님, 이 비굴하고 불쌍한 인생들로 다시 회복되어

주님께 진정한 예배드리는 예배자로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면,

이제라도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를 하게 하옵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님께 묻고

말씀이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케 하옵소서.

주님께 기도하는 것을 비웃고

주님께 회개하고 철저하게 겸비하여

금식하고 기도하기를 힘쓰지 않고

현실에 부역하며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시 한번 순교자의 신앙으로 일어나

주 하나님께 회개하고 영적 순결을 회복하여

주 예수님께 정절을 바치는 거룩한 신부되게 하옵소서.

가슴이 아려오는 이 대한민국 교회를 품으신 주님,

우리로 정결한 신앙을 회복하여

우리 주님의 영화로우신 이름을 높여드리며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며

북한을 치유하며

북한의 성도들과 함께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의 사명 감당하여

우리 주 예수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선교와 순교의 사명 감당하는

이 대한민국 교회 되도록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영적 분별력을 회복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더럽혀진 예배가 회복되고

진정한 예배, 주님 앞에 목숨 걸고 드리는

간절하고 진리가 살아있는 예배드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의 긍휼하심을 소망하며

그렇게 역사해주실 주님께 감사 찬양 드리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 흘려주신 주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며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준희목사

신촌예배당 부목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졸업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졸업